SAVIOR

[솔부] SAVIOR 07

콤타 2018. 5. 4. 19:44

[솔부] SAVIOR 07

W. 콤타 (@comtar34)


 

 

 

 

 

  그 말을 끝으로 문은 굳게 닫혔다. 두드려봤자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그들은 그저, 문 앞에 버텨 서서 제가 포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한다. 이딴 데 처박혀서 죽을 걸 알았다면 그리 아등바등 노력하지도 않았을 거다. 내가 왜 이딴 곳에서-

  고개를 들어 방을 두리번거리자 낯익은 구조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에 정리된 파일들과 중앙에 놓인 목제 책상, 스탠드와 커피포트. 모든 것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 부조화스러운 장소는 어렴풋하지만 한솔의 방과 비슷했다. 새하얀 벽지는 모든 건물에 똑같이 발려있는 것인데도 어째서인지 이 방은 더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뒤지기 싫으면 직접 가져오라 이건가, 관련 없는 일에 연루된 것도 짜증나는데 이젠 지 집 개새끼마냥 이거 가져와라, 저거 가져와라 지랄도 유분수였다. 그렇게 잘났으면 자기 발로 찾으면 되잖아, 왜 애꿎은 사람한테 이래. 재수 털리는 면상을 한껏 갈겨주는 상상을 해보지만, 그 이상은 턱도 없다는 걸 제가 제일 잘 안다. 무력으로 나갈 수도 없고 뭔가를 찾기 전까지는 소장을 만날 수도 없다.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자료를 찾아내라는 건 능력 밖의 일이다. 한솔이 제게 무언가를 맡긴 것도 아니고 하물며 그런 게 있으니 조심해라- 말 한 적도 없는데, 무엇을 그리도 확신해서 사람을 이 어두컴컴한 곳에 가둬둔단 말인가. 이젠 뭐, 다 부질 없는 한탄이다.

  욱신거리는 발목을 일으켰다. 그리곤 한솔의 서랍과 책장을 미친 듯이 열어젖혔다. 작은 서랍들은 대부분 비거나 작은 티(tea) 포가 담겨있었고 여유분을 위한 연필과 샤프들만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노트북만 두들기던 사람이 웬 연필이람. 막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름 그에 대해 알고 있다 자신했는데. 남겨진 퍼즐들로 그를 알아간다는 게 참, 달가우면서도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나한테 빅엿을 먹이고 토낀 새끼인데. 어디 작은 종이에라도 적어놓지 않았겠냐는 생각에 온 방을 쥐 잡듯 뒤졌다. 먼지 쌓인 3단 책장과 작은 단추들이 여러 개 놓여있던 책상 아래. 딱히 꼼꼼한 성격은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눈이 닿는 공간은 죄다 건드려보았다. 그는 뭐든지 엉망으로 섞어두는 게 재능이었으니 말이다.

 

  한솔은 진짜 도망친 걸까. 손에서 퀴퀴한 먼지 냄새가 베어 갈 즈음, 초조함은 숨겨두었던 만약을 불러왔다. 이젠 지친다며 울먹이던 게 실은 자신을 위한 도주로를 파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나쁜 생각도 들었다. 분명 지가 책임지겠다고 실컷 떠들어 댈 땐 언제고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울컥하는 감정에 못 이겨 벽만 내리 찼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보다 왜 제게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었는지 그게 더 화가 났다.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하지, 널 믿었던 나는 뭐가 되는 거야. 계속되는 마찰에 하얀 벽지엔 까만 흠집이 생겼다. 몇 번이고 발로 내려쳐봐도 곱씹기만 하면 열이 뻗쳤다. 이 개새끼 진짜 걸리면 가만 안 둬. 묘하게 울리는 웅-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지만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제 기분만 더 잡쳤다.

 

  잠깐,

  벽에서 웅?

 

  발끝이 닿았던 곳은 다른 벽들과 다른 재질의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여긴 그 지하실이 있던 벽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튼을 걷히자 역시나, 전에 보았던 철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이 안까지 가야하는 건 아니겠지. 굳이 여기다 처박아 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했지만, 불쾌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어차피 한솔이 없으면 열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꼭 좋지만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인생이고, 그걸 가장 여실히 느끼는 최근이었다. 설마, 아니지..? 저 컴컴한 곳을 불빛 하나 없이 내려갈 상상을 하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끼쳐왔다.

  문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냉기가 전해진다. 철 지난 영화들처럼 위험한 소문이나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한솔을 드나들게 한 철문일 뿐이다. 저 안엔 인륜을 저버린 실험체가 있고 저는 그것에 경악해 한솔을 질책하였다는 사실 빼고는, 변함없이 철로 된 문일 뿐이었다.

  이런 실험실 앞에다가 굳이 저를 던져두었다는 것은 제게 그 정체모를 존재를 들켰다는 걸 소장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제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이밀며 자료를 찾아오라 부득불 우기는 것도 전부 일맥상통한 의미겠지. 저는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소장도 그 존재에 대해 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닌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대체 왜? 저 문밖의 사람들을 가져다 시켰으면 진즉 찾아내고도 남았을 텐데.

 

  수 십 번을 생각해봐도 이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고작 개인 컴퓨터 하나를 못 뒤져서 저 많은 사람들을 고용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까짓 거 들어가 보면 알겠지 싶지만, 몸은 생각처럼 쉽게 따라주는 대상이 아니다. 알면서도 함정에 빠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손잡이도 하다못해 열쇠 구멍도 없는 견고한 철벽을 어떻게 뚫어야할지 저는 모르겠다.

  그냥 밖의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 안을 뒤져보라고 말할까, 그 다음에는 알아서 잘 하겠지. 이 이상은 발 담그지 말라는 경고로 스스로를 다잡지만 막상 한솔의 마지막 말이 떠오르면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저들이 어떤 짓을 할 줄 알고 이걸 맡긴단 말인가.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진 격이었다.

  엄마 나 어떡해. 새어나오는 한숨이 무거웠다. 내가 왜 애꿎은 놈한테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냐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뱉는 한숨과 함께 남아있던 기력도, 반항심도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축 처진 이마를 문에 갖다 대자, 냉기가 복잡한 머릿속을 식혀주었다. 콩콩. 든 건 많은데 해결되는 게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 순간,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이게 뭐야, 왜 이래. 그냥 문에다 머리만 좀 콩콩 거렸을 뿐인데, 가만있던 철짝이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뭐 잘못 건드린 거야? 당황한 나머지 뒷걸음질 치다 책상 위로 엎어졌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니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꿈쩍 않던 철문은 어느새 열려 있었고 지하를 향한 시커먼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이게. 말도 못하고 어벙해 하는 와중에도 계단은 찬바람을 내뿜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치자, 딱 봐도 위험해 보이잖아. 머리 위로 비상벨이 울리며 위험 신호를 보낸다. 조상님이 주시는 간절한 신호를 외면하지 마라, 부 승관. 네가 뭘 할 줄 안다고 저길 들어가.

  막상 생각은 그렇게 한다만, 기다렸다는 양 열려버린 입구를 쌩하니 외면하는 것도 어려웠다. 저곳에 답이 있다는 건 아는데 막상 뛰어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는 애매모호한 상태. 제가 왜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그와 함께 솟아오른 호기심도 부정하긴 어려웠다. 여태껏 아무 일도 없었던 놈이 머리 좀 닿았다고 움직이는 건 또 뭐야. 좀 궁금해진 게 사실이었다.

  지지리 궁상맞은 내 인생. 다음 생엔 복권 번호나 알려주세요, 할아버지.

  한참을 입구에서 머뭇거리다 이내 결심이 섰다. 얼마 없는 배터리로 라이트를 키고는 한 발 한 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변함없이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에 심지어 조명도 어두침침한 방. 지하실이란 게 본디 그런다지만 여기는 제가 봐왔던 다른 곳들과 달리 유난히 풍기는 분위기마저 을씨년스러웠다. 열려있던 문이 닫혔는지 한 번의 쿵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중첩되어 제게 돌아온다. 이젠 진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도망칠 수도 없어. 어차피 그만두지도 못할 거 용기나 내보자고, 스스로에게 건 주문이 마치 막다른 골목에 갇힌 제 미래를 표현한 것 같아 살짝 눈물이 일기도 했다. 땅에 흩뿌려진 A4 종이들을 대충 걷어차며 한솔과 마주했던 수조 앞으로 다가갔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깊게 잠들어 있는 저것은, 어지럽혀진 방과 달리 혼자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창조주가 도망친 마당에 바깥사람들은 저를 잡겠다고 혈안이 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나 있을까. 짙은 쌍꺼풀 밑으로 어떤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지 이 요란 속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막상 이 앞까지 달려오긴 했다만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아이로 뭘 어찌해야하나. 한솔처럼 명석한 두뇌를 가진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연구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것도 아닌지라, 여기에 서있다 한들 특출 난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천재 박사가 만들어낸 금기의 산물을 앞에 두고 탈출을 모색한다는 게, 참 웃기지도 않은 일인데 말이다.

 

  시커먼 바닥 위에는 용도 모를 장비들 외에도 난잡하게 글씨의 종이들이 많았다. 기록이 남을 걸 염려했는지  대부분 손으로 적혀 있었는데 평소 가지런했던 한솔의 글씨체와 달리 굉장히 날려 쓴 것들이 많았다. 꺼내는 파일마다 무성의한 글자나 붉은색 가위표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간혹 보이는 의미 없는 숫자들이 종이 끝자락에서 저를 농락하기도 했다. 종이 좀 뒤진다 해서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즉 연구가 완성되고도 남았지. 이젠 두려움보다 성질이 뻗쳐 손에 잡히는 파일들을 모두 내동댕이쳤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연구 기록을 그리 찾기 쉽게 놔뒀을 리 없다. 찾았다 한들 연구를 재개할 수 있는, 한솔보다 뛰어난 연구자를 찾아오는 것도 하루 이틀 내로는 불가능했다. 침착하게 생각하자. 번잡하게 머리 굴려봤자 해결될 일이 없다는 걸 몸소 겪어보지 않았나. 쓸 만한 두뇌라고 자부해왔던 이십여 년의 세월에 녹이란 녹은 다 쓸린 기분이었다.

 

  좀 단순한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만약 제가 한솔이었다면 어땠을까. 분명 연구고 나발이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겠지만 그는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그를 미루어볼 때, 찾기 어려운 곳보다는 찾았다 해도 손대기 힘든 곳에 놔뒀을 가능성이 컸다.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으니 미리 안전장치도 모색해 뒀을 것이다. 이미 폐기되었을지 모른다는 -그래서 이 감옥에서 탈출하게 된다는- 시나리오도 가능성 있지만. ‘저것’이 남겨져있는 걸 보니 그다지 고려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고된 노동에 지쳐버린 머리는 열과 고통을 호소하며 제게 항의했다. 피곤한 몸 상태에 더해 공기 탁한 벽돌들마저 괴롭히니 되던 일도 말아먹을 만큼 한숨만 늘어갔다. 이게 그가 말해왔던 답답함이라는 걸까. 가슴이 콱 막히고 숨도 쉬기 싫어지는? 억지로 떠맡겨진 책임에 화를 느껴야 함이 자명한데도, 무안해질 정도로 그에 대한 동정심이 일었다. 우울함이 자꾸 되도 않는 바람을 끄집어냈다.

 

  이젠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며 넋두리 아닌 넋두리로 시간을 때우는데 둥둥 떠 있는 손발들이 시야에 걸렸다. 나쁜 새끼.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지 아냐고 확 욕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네 부모는 어디가고 너 혼자 거기서 자고 있냐. 어차피 전하지도 못할 말일 테지만,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너 때문에 내 모든 일상이 망가졌다는 게 참 허망하고 허탄했다.

  지친 엉덩이를 들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약 없는 꿈을 꾸는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편안해 보였다. 정체 모를 존재에 그새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수조 외면으로 둥그런 제 얼굴이 비춰졌다. 톡 튀어나온 광대 옆으로 나뒹구는 쓰레기들도 보였는데, 시선이 닿는 족족 지저분한 것만 많아서 나중에 그가 눈을 뜨면 왜 이렇게 더럽냐고 화낼지도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콧김만큼이나 매가리 없는 웃음만 나왔다. 이 좁아터진 지하실만이 네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전부인데-

 

  전부?

  저 아이의?

 

  지하실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기억하면서 한솔의 행동반경을 유추하기 용이한 존재.

  남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고 박사인 한솔 또한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공간.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답을 일축시켰지만 한 번 떠오른 의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전 연구과정을 지켜보고 데이터베이스를 기억하고 있을 유일무이한 대상이다. 애써 시선을 피해 봐도 머릿속을 장식하는 질문들은 이미 한 단계 너머의 것이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것을 깨워 소장 앞으로 데려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솔이 저 안에 무언가를 숨겨두고 갔으니 내가 찾아야한다는 의미인가? 퍼져가는 생각의 가지들은 전부 수조 안의 왕자를 양분으로 싹틔우고 있었다. 

  만약 한솔이, 그조차 손대기 어려운 저것 안에 그 연구 기록을 숨겨두었다면? 아마 그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탐할 수 없을 것이다. 억지로 꺼내려 든다면 도리어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수년의 노력마저 날아가 버릴지 몰랐다. 전제를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머리를 강타하는 사실들이 하나로 정립되었다.

 

  저것을 꺼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