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부] 蟲夢 下
“승관아, 나 눈 떠도 돼?”
“...”
“나 무서워. 나 집에 갈래.”
“...”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이건 분명 승관의 장난이라 생각하면서도, 발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움직이려할 때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 진짜 화 안낼 테니까 이제 그만해. 눈을 감고 있으니 아주 작은 소리에도 신경은 곤두섰다. 작은 팔을 대야에 담그는 소리, 끈적한 풀을 들어 올리는 소리, 벽에 무언가를 치대는 소리. 그리고 점점 많아지고 무거워지는 날갯짓. 저녁 강가에서 듣던 그런 기분 좋은 소음이 아니라, 굉장히 거칠고 서로 부딪히느라 정신이 없는 기분 나쁜 소리.
어떤 소리가 나도 쳐다보지 마.
승관은 내게 눈을 뜨지 말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든 본인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자부하고 나를 원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해결은커녕, 이 어두운 부둣가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듯싶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분명 눈을 뜨면 승관은 겁먹은 제 얼굴을 보며 마을이 떠나가라 웃고 있을 것이고, 혹여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 저를 찾아 엄마 아빠가 서있을지도 몰랐다. 귀를 스치는 바닷바람에 지레 겁을 먹어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 걸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몸을 짓누르던 긴장이 풀렸다. 발바닥에 찬 땀은 이제 찝찝하게 느껴졌다.
한쪽 눈을 슬며시 떴다. 승관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조금 겁이 나서,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웃고 있다면 작정하고 화를 낼 예정이었다. 어떻게 이런 장난을 치냐고.
그런데 막상 돌이켜보니
그 아이가
이유 없이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가끔 엄마를 따라 화장실 청소를 하다 보면, 새카만 머리카락들이 한 데 뭉쳐 하수구를 막고 있을 때가 있었다. 어차피 다 내 몸에서 나온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게 참 더럽고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그런 나를 위해 머리카락부터 젓가락으로 치워버렸다. 변기나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뭘 겁내하냐며 장난스럽게 놀렸는데, 나도 그것이 더럽고 위험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다만, 멍하니 물에 젖은 덩어리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면,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수십 개의 발을 놀려 내 몸을 기어오를 것 같았고, 잠깐이라도 눈을 돌린 사이 집안 어디에서 그 덩어리를 불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망상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아서 괜찮았던 일들이, 막상 눈앞에서 벌어진다면 그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작은 틈새로 보이는 건 분명히 아주 큰,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분명 누구도 보지 못했을 크기의 지네였다. 가죽 소파와 같은 몸체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 벽을 타오르고 있었다. 그 위로 아주 작은 지네들과 파리들이, 구더기 따위의 벌레들이 올라타 있었다. 그들은 마치 달콤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점점 더 격렬한 소리를 내며 지네의 등에서 기어 내려왔다. 구더기들 몇 마리가 땅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기도 했는데, 그것들이 지나가는 자리에 알 수 없는 끈끈한 액체들이 길게 늘어졌다. 흙장난을 할 때나 보던 것들이 아니었다, 분명.
점점 늘어났다. 귀에 울리는 윙윙 소리가 점차 커지고, 수 백 마리의 지네들과 구더기들이 한 데 뒤섞이기 시작했다. 작은 파리와 날벌레들이 부둣가 쪽으로 날아드는데 이를 잡아먹을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벽에 흘러내리는 밥알에 홀린 존재들처럼 거대하고 역겨운 몸을 움직였다. 천장에서부터 벽 아래까지, 내가 서있는 발끝에서 저만치 떨어져서는, 비린내 가득한 땅을 뒤덮었다. 수 백만, 아니 수 억 마리의 벌레들이 한 데 뒤섞여 꾸륵꾸륵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그 모습은, 내가 죽도록 싫어하던 머리카락 덩어리처럼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곧 내 다리를 타고 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 승관아”
정신을 차린 게 아니었다. 얼이 빠져 있었다. 너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여기서 너 마저 없다면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것 말고는 무얼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래서 무작정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는 아까처럼 당연히 대답을 하지 않았고 간간히 너의 존재를 일깨워주던 철벅이는 소리는, 벌레들의 몸짓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네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뻣뻣이 돌아가는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있어야할 너를 찾았다. 너는 몸 전체에 구더기를 가득 두른 채로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풀을 바르고 있었다. 옷 안으로 징그러운 지네 수 십 마리가 들락거리는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풍경 속에서 목소리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겁을 먹은 존재는 나 하나뿐이었다.
“승관아!!! 승관아!!!!”
다시 너를 불렀다. 너는 그제야 팔을 내리고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날아다니는 벌레들에 시야가 가려졌는지 한참을 휘적이다, 작은 두 눈이 내 시선과 마주쳤다. 너는 들고 있는 바구니를 던지고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네가 서있던 자리는 마치 누가 금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벌레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발끝이 떼이는 순간 수십 마리의 벌레가 네 그림자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 때가 되어서야, 네가 왜 내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끈적한 벽과 한 데 섞인 벌레들의 모습은 가히, 구역질조차 올라오지 못할 만큼 역겹고 소름끼치고 무서웠다.
너가 내게 무어라 소리쳤다. 이제까지 절대 볼 수 없었던 화가 어린 얼굴로 내게 고함치고 있었다. 나는 이 징그러운 날개짓 소리에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으로라도 대충 그 의미를 알고 싶어서 고개를 내빼고 네 입모양에 집중했다. 라고...? 감..라고..? 내게 달려오는 너는 아까보다 더 큰 목청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가까워지는 너를 보고 있음에도 아무 것도 들리지가 않았다. 승관아 이상해,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너를 더 자세히 보려고 단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이제껏 들리지 않았던 너의 목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감으라고!!!!!!!”
눈을 감으라고? 나는 본능적으로 내 몸을 내려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원의 중앙에서 서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 왼쪽 발은 하얗게 그려둔 원의 금을 밟고 있었다. 너의 목소리를 들으려 움직인 나의 한 두 걸음을 보고, 넌 필사적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눈을 감으라고. 그리고 입을 닫으라고.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면 사고회로가 마비된다. 분명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언어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이지 잘 알고 있으면서, 몸이 그를 따라주지 않는다. 나는 그냥, 너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네가 외치는 대사들을 하나 둘 곱씹고 있었다. 눈을 감으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내게 고함치는 네 말을 흘러가듯 되뇌었다.
너는 금세 내 앞까지 다가왔다. 네 몸을 휘젓고 다니던 벌레들은 네가 원의 금을 밟는 순간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기묘한 소리를 내며 네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몇 마리는 너와 내가 열심히 칠하던 벽으로 도망갔는데 태반은 원을 따라 돌며 너와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분명, 너와 내가 다시 금 밖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나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적어도 두 뼘은 나보다 작은 주제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자신이 흐트러뜨린 금을 이으려고 했다. 네가 움직일 때마다, 그리고 내가 네가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 겁을 먹고 눈을 돌리지 못할 때마다, 그것들은 점점 더 날카로운 소리와 행동으로 우리를 주시했다. 천장에 붙어있는 그 커다란 지네의 하반신이 어느덧, 너와 내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토가 올라올 것 같았다.
“괜찮아. 그대로 있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입 닫아.”
“...”
“눈 감으라고, 최 한솔!!!!”
그래, 그래야지. 머리는 네 말을 따르라고 하는데, 옆을 지나며 풍기는 악취의 존재에 나는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는 상태로 굳어버렸다. 벌어진 입에서 마치 그것과 같은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았다. 입안이 말라가고 입술이 갈라지는 순간에도 너는 나를 깨우려고 했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한솔아. 정신 차려. 이제 곧 사라질 거야.”
“...”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그래? 그런 거겠지? 너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나보다 더 어설픈 솜씨로 원을 그려놓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정수리까지 벌레를 둘둘 감고 있을 때는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지금은 큰 죄를 지은 다섯 살짜리 꼬마아이 같은 모습을 했다. 너는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있어. 네 입으로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근데 너는 왜 그래?
하늘에서, 아니, 천장에서 작고 검은 뭉치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작은 덩어리들이 천장에서부터 나타나더니, 벽 주변을 서성이다 이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저 벌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발치가 아니라 머리 위에서부터 우리를 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너는 나를 걱정하고 끊어진 원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천장에서 거미와 같은 존재들이 슬그머니 나타난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그것들이 이제는 우리 머리 위로 나앉기 직전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걸 발견하고 끝까지 좇는 사람은 아마 나뿐이었던 것 같다. 너는 내게, 동이 틀 때까지 버틸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네 말을 듣고 있었음에도, 내게 다가오는 그 수 만 개의 눈동자들을 뿌리칠 수 없었다. 역겨운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저 벌레들의 눈에는 수 만 명의 너와 내가 있었다.
“어, 괜찮아.”
생각이란 게 되지 않아서 그냥 그렇다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겁을 먹어 벌벌 떨던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는데 점차 두려움이 가라앉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만, 마치 내 감정을 뺏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너는 점차 얼굴이 일그러져갔고 나는 아까의 너처럼 차분함을 되찾았다. 입을 열고 똑똑한 발음으로 네게 괜찮다고 말을 건넸다. 너는 그제야 내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너는, 나와 같이 머리 위에 매달린 수 천 개의 머리카락 덩어리들을 쳐다보았다. 아까보다 더 파래진 안색으로.
“한솔아”
“어?”
“최 한솔. 너”
“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의 수직으로 꺾인 목이 너무 아파서 고개를 수그리자, 너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나를 다그쳤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 줄 아냐고 계속 화를 내길래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성을 냈다. 주변을 감싼 수 억 마리의 존재들을 앞에 두고 너는 내게 겁에 질린 질책을 했다. 나는 그저 쟤네들을 쳐다본 것 뿐인데 너는 이상하리만치 내게 화를 냈다. 대체 왜 그래. 내가 눈 안 감아서 그래?
“너 입에... 지금 뭘 먹은 거야?”
내가 먹어? 뭘? 나는 네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줄곧 멍하니 저것들을 바라봤을 뿐인데 너는 내게 소리를 지르고 겁을 먹더니, 이제는 내가 무언가를 먹었다며 당장 뱉으라 성화였다. 승관아 너 진짜 왜 그래. 나는 네가 틀렸음을 보여주고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혀를 움직이며 난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넌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말을 더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혀를 움직일 때마다 길고 가는 무언가가 혀끝과 이빨 사이에 걸렸다. 처음 겪는 이물감이 이상해 손가락으로 그것을 잡아당기자 내 입에서 실 같은 것들이 끌려 나왔다. 처음에는 한 두 개로 생각했던 것들이 점차 두 세 가닥으로 늘더니, 나중에는 입에서 뽑아낸 실들이 한 뭉텅이가 되었다.
마치 사람의 머리카락처럼 보였다.
“뱉어!!!! 뱉으라고!!!!!”
“어..?”
“한솔아, 뱉어. 다 뱉어!!!”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실 같은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이곳저곳을 구부렸다 피며 자신이 의식이 있고 의사가 있는 생명체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내 손밖으로 털어내고자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냥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속에서는 구역질이 올라오고, 그것은 내 손가락을 감아 내리며 도망갈 곳을 찾아 헤맸다.
“최 한솔. 정신 차려!! 최 한솔!!!!”
나는 그것을 던지지 못했다. 아마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너는 넋이 나간 나를 깨우려고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고 흔들었지만 어떤 것에도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내 손을 타고 흐르는 이질적인 것에 눈과 마음이 뺏겨 아마 끝까지 그것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입 안에 있던 것들은 전부 뱉었었나? 딱딱한 입천장을 혀로 쓸어보는 와중에도 나는 이 작은 뭉치에 집중했다. 그것은 내 손을 타고 내려 땅바닥에 안착하더니, 그대로 원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그것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너와 내 주변을 감싼 커다란 지네에 시선을 주다가,
그대로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내가 눈을 떴을 땐 아무 것도 없이 너와 나만 남겨진 채로 부둣가 위에 누워있었다. 파리하던 안색이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너는 내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 너는 나보다도 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음울할 정도로 잔잔한 얼굴을 하고선 내 옆에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나는 너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콘크리트에 맞닿아있는 네 맨살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너를 흔들어 깨웠고 너는 몇 번 눈썹을 찌푸리다 돌연 듯 몸을 일으켜 나를 찾았다.
“나 여기 있어.”
네가 내게 건넸던 첫 말이 무엇이었지? 애써 떠올리려고 노력해봤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의 아침은 굉장히 흐릿하고 덧없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긴 시간 꿈을 꾼 것을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구름 위에 떠있는 기분이었다. 아마 너는 나를 걱정하고 나는 너를 안심시키려 괜찮다고 대답하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그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내가 그 날 부모님께 죽도록 혼났을 리 없고 네가 어느 순간부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 리 없다. 나는 그 날 겪은 일이 마치 한 편의 공포 영화를 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의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둘째 밤이 지나며 기억이 점차 무뎌졌다. 너는 그것을 아니꼬워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내게서 무언가를 캐내거나 상기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네게 축구를 하지 않겠냐 물었고, 너는 정중하게 나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이 있는 부둣가로 오지 말라고 했다.
* *
“아직도 여기 사는 거야?”
“뭐 그렇지.”
“불편하진 않아? 계속 여기 있으려고?”
달리 갈 곳도 없어. 너는 어스름히 드러난 동정심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리고는 예전과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저 깊은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의 그런 모습이 좋아서 슬쩍 네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네게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몸은 아프지 않은가 근황을 묻고 싶었는데 막상 얼굴을 가까이하니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네가 마음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싶었다. 너는 곁눈질로 나를 훔쳐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것 같진 않은데,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처음 만났던 날의 너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너는 어때?”
네가 내게 물었다. 나? 어떠냐는 게 무슨 말이야? 내가 새초롬한 얼굴로 너를 바라보자, 너는 내게 그냥이라는 말만 덧붙였다. 부모님이나 대학교 얘기를 묻는 걸까 싶어, 나는 얄팍한 얘기에 살까지 더해 대답을 끝마쳤다. 아마 내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면 너를 이 갑갑한 섬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그랬던 것 같다. 너는 내 얘기를 들으면서도 간간히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작게 미소를 짓는다거나. 감정 없는 인형처럼 앉아 있던 지난 날의 네가, 마치 거짓말 같았다. 분명 그 시절의 너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사소한 것 하나에 미소 짓는 네가 참으로 가슴 따듯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아?”
“괜찮지. 안 괜찮을 게 어디 있어.”
“어디 아프진 않고?”
간혹 이상하게 아프거나, 안 그러지? 너는 몇 번이고 내 안부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 과장하며 팔을 흔들어 보이거나 몸을 일으켰다. 나 진짜 엄청 건강해, 그러니까 네 몸이나 걱정해.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는지 혹은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였는지 새삼 놀라웠다. 너는 정말이지 다른 사람 같았다. 부드럽게 나를 달래거나 미소를 짓는 모습에 계속 가슴이 설렜고 이런 너라면 몇 번이고 이 갑갑한 섬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었다. 이상해, 너는 진짜 이상해. 알아?
“밥은 먹었어?”
내가 묻자 너는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에 말랐던 이유도 아마 입이 짧아서 그랬던 걸까, 나는 제 때 밥을 챙겨 먹지 않는 네가 걱정되었다. 시간이 되면 같이 밥이라도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너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같이 식사를 하자고 권유했던 게 그리 놀라웠던지, 한참을 그리고 또 한참을 바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다. 완강한 모습에 나는 두 손 두 발을 들며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랬다.
“날 추워지니까 옷이라도 두껍게 입어. 그러다 감기 걸려.”
너는 내 말에 또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다고 했다. 워낙 온난한 곳이니 큰일 치루진 않을 테지만 바닷바람을 무시했다간 큰 코 다친 다는 것을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았다. 나는 도리질 하는 네가 귀여워 그만 잔소리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부모도 안 할 잔소리를 오랜만에 만난 제가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웃겼을까.
슬슬 정오를 지났는지 배가 고파왔다. 잘 챙겨먹으라고 부모님이 카드를 쥐어주시긴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굳이 편의점 음식을 사먹고 싶진 않았다. 자취할 때 물리게 먹은 레트로트를 여행 중에도 먹어야 하다니. 괜스레 소름이 끼쳐 쥐고 있던 카드를 냉큼 지갑으로 숨겨 버렸다. 몸을 일으키자 네 시선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 동그란 시선이 꽤 귀엽게 느껴져서 나중에 또 오겠다고 귀여운 약속을 덧붙였다. 너는 또다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제 가는 거냐고 물었다.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그렇게 답하니 너는 어째서인지 안심한 표정으로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중에 봐. 파도처럼 청량한 목소리가 돌고 돌아 내 귀에 닿았다. 참 사랑스러운 인사말이었다.
“근데 승관아.”
왜?
“내가 배가 고파서 그런데”
응.
우리 집 갈ㄹ...
“쟤네”
어?
“쟤네들 있잖아.”
뭐?
“지금 눈앞에 있는 쟤네”
“내가 먹어도 돼?”
너는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