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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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부] Tuning
W. 콤타 (@comtar34)
Avoid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아무리 혼자 태어나고 혼자 떠나가는 세상이라지만 우리는 겉멋에 취한 스스로를 좀 더 냉철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보다 굉장히 나약하고 겁이 많으며,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고를 한평생 지니고 살아간다. 자고 나란 것이 다르다는 말은 허울 좋은 구실일 뿐인데 어른들은 아직도 보아뱀과 모자의 차이를 단순한 감수성의 결부로 취급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들어내는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화병 진단을 내리는 의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 단어를 주르륵 써넣어줘야 만족하는 환자들 사이에서 그들이 느끼는 따분함과 무력감은 아마 아이큐 135의 머리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배덕을 눈감아 주는 사려 깊은 태도를 취할 생각은 없다만, 직업의식을 운운하며 당신들의 도덕성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 또한 물론 없다. 손에 잡히는 향기를 찾아 떠나는 것은 타라 덩컨 같은 소설 속의 마법사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모서리가 닳아빠진 해리 포터를 방구석 장식품처럼 쌓아두는 게 일상이 돼버린 사람이다. 답답해. 흉하게 남은 붉은 자국을 보며 목 단추를 느슨하게 풀어 버렸다. 눈꺼풀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온 바닥이 내려앉는 상상을 한다. 온 세상이 멈춰버리는 순간, 천둥 같은 소리가 내려치고 물컹거리는 몸체는 지하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거다. 우연찮게 계단 틈 같은 곳에 끼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빛도 물도 없는 콘크리트 무덤 속에서 숨이 붙어있을 시간이 얼마나 길까. 극한의 공포는 오히려 극도의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 공기 한 점 없는 요람 속에서 구더기가 바글거리는 팔뚝 위를 새빨개 질 때까지 벅벅 긁었다. 또 시작이군. 퍼져가는 간지러움에 닥치는 대로 몸을 긁어대지만 역시나, 비타민 결핍의 흰 피부 위엔 얇은 머리카락 한 올 조차 보이지 않았다.
밥시간이 지났다. 생각 없이 시계를 바라보다 알게 됐는데, 식당이 열린지 정확히 1시간 27분을 지났고 이는 배식 받은 사람들이 밥을 다 먹고 직원 아줌마들이 식당을 정리하기 시작한지 7분이 지났다는 소리다. 오늘 저녁에 나물들이 반찬으로 나왔던가? 만약 설익은 밥과 싱거운 콩나물 무침이 함께 식판 위로 올라왔다면 그냥 눈이나 감고 공상 따위를 하는 게 백 번 천 번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반듯한 정사각형 종이로 많은 학들을 접어봤지만 땀이 많은 손 때문인지 번호를 표시한 검은 잉크가 얼굴과 몸통을 얼룩덜룩하게 만들었다. 재미없어. 날개가 찌그러진 새들 뒤로 쓰지 않은 식권들이 산처럼 쌓아 두었다. 식사를 거르지 말라던 퉁명스런 말투의 사람은 저를 한 번 슬쩍 째려보고는 종이판 위에 빠른 속도로 글씨를 휘갈겼다. 사실 밥 먹는 데까지 왜 시간을 지켜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듯 이곳에선 이곳 사람들이 세운 규율을 따라야 했다. 어차피 발로 쓴 것 같은 그 악필을 알아볼 수도,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왜 자꾸 제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다. 열어두고 간 문 틈으로 저 멀리 카트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 바퀴가 낡아서인지 굴린다기 보단 거의 쓸리는 것에 가까웠는데, 밤늦게 들려올 때면 저마만큼 사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한 오 분만 지나면 신입 간호사 하나가 쉬지도 못한 채 링거와 약이 수북이 담긴 카트를 끌고 들어와 우리들에게 점심 약을 나눠줄 것이다. 불쌍하기도 하지.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 나를 가끔씩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는데, 원한다면 이 촌스러운 파란 이불을 언제든 본인에게 양보해 줄 수 있다는 걸 그녀가 알아줬음 했다. 가까워진 카트 소리와 함께 반 쯤 열려있던 문이 완전히 젖혀지고, 깡마른 팔다리가 불쑥 튀어나와 내 이름이 적힌 봉지를 찾아 약통을 뒤적였다. 노랗고 빨간 것 따위를 손가락이 재빠르게 옆으로 밀쳐내는데, 꼭 그녀가 약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약들이 그녀를 피해 도망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제 이름을 찾았는지 곧바로 봉지에 담긴 초록색 알갱이가 눈앞에 내밀어진다. 다른 것들과 달리 유달리 냄새가 심해서 몰래 몰래 약을 버리곤 했는데 한 4일을 그랬을까, 정수기를 청소하던 아저씨에게 딱 걸리는 바람에 담당 의사에게 된통 욕을 처먹고 간호사들에게 둘려 싸여 한동안 감시를 받았었다. 지나고 나니까 우스운 기억이지, 그 땐 어떻게 해야 저 쓰레기를 피할 수 있는지 필사적으로 고민하고 그랬었다. 전적이 화려한 몸인지라 잠깐이라도 딴 짓을 했다간 억척스러운 팔들이 여러 개 나타나 제 머리통과 아가리를 붙잡고 약을 들이 부을 게 뻔했다. 재수 옴팡지게 없어, 그치? 손바닥에 눌러 붙은 약을 입 안으로 털어놓고 물 없이 꿀꺽 삼켜버렸다. 식도에 걸릴 수도 있다는 말이 들려왔지만 어차피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인생이라 위협 하나쯤이 더 늘어난다 해서 불편할 건 없었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 입 안과 혀 밑을 한 번씩 확인하고는 무거운 카트를 끌고 방을 나가 버렸다. 지 혼자 닫히는 문을 멍하니 쳐다보다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뉘였다. 여자 말이 맞아서인지 아님 괜한 말을 들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괜히 목구멍이 간지럽고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그렇다.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야, 안 그래? 센스 없는 그녀의 주둥이를 탓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전등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던데 조만간 고쳐달라고 간호사에게 말해야겠다.
핑크색으로 온 몸을 염색한 고양이를 본 적 있는데 생각과 달리 손에 스치는 분홍 털이 굉장히 부드러웠다. 머리카락을 염색하면 아무리 린스를 들이 부어도 예전 머릿결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과 달리 그 아이는 발등에 난 작은 털들마저 솜사탕처럼 매끄럽고 푹신푹신 했다. 앞발을 붙잡고 한참을 주물거리면 제 팔뚝을 할퀴며 온갖 짜증을 부려댔지만 곧 그 귀찮음을 수용하고 하는 수 없단 듯 제 품에 꼭 안겨 있었다. 한 품에 들어오는 따듯한, 보송보송한, 싸구려 과일 향기가 나는 머리통과 목덜미 사이에 코를 박으면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괜찮으니 너와 날 둘러싼 세상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심장 박동이 가라앉고 등판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온도에 마음이 풀리면 습관처럼 네 털을 잡아당기는 짓궂은 장난을 쳤는데 그만두라는 야속한 말 대신, 내 품에 마주 안겨오며 하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애교를 부렸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머리통이 좌우로 도리질 칠 때마다 멍청한 심박도 같이 위아래로 흔들려댔다. 발치에 있는 이불을 끌어올려 흉한 내 다리를 가리고 빠져나갈 구멍도 없이 널 팔 안에 가두고 나면 네 모든 걸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나 하나 뿐인 것 같은, 네 세계의 전지전능한 무언가가 된 것 같은 교만하고 오만방자한 기분이 들었다. 지구 어디에 있어도 널 가장 사랑하는 건 나라며 거친 비바람을 막기 위한 울타리를 세우고 전깃줄을 매달았지만 사실 너도 나도, 이건 내 세상 속에 널 가두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란 걸 알았다. 난 널 지키기 위해 널 가뒀다. 고양이의 작은 앞발질로는 절대 뛰어 넘을 수 없는 나무판자를 눈앞에 세우며 절대 도망치지 않겠다고, 한평생을 이 놀이터 안에서만 살아가겠다는 악독하고 이기적인 수락을 강요했다. 그 때 들렸던 울음소리는 아마 내가 소름끼치게 싫다는 부정의 표현이었겠지만 네가 내뿜는 분노마저 사랑으로 치부해 버릴 만큼 난, 작은 앞발이 주는 관심 자체가 너무도 간절했다.
그러나 결국 이브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다. 뭐,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안타까웠다고 해야 할까. 사악한 뱀에게 속아 과실을 삼킨 죄로 낙원에서 쫓겨났고 인간의 몸이 되어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야 했다. 땅바닥으로 떨어진 신의 권위가, 주워 담을 틈도 없이 모래알처럼 허망하게 흩어진 거다. 피로 물든 가시밭길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을 수없이 난도질 하지 않았을까. 잔주름 하나 없던 고운 손끝이 부르트고 복숭아처럼 부드러웠던 발꿈치에 핏물이 고이는 걸 본 순간, 멍청했던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하나 쥐어뜯고 싶었을 거다. 방정했던 입술을 잘라내고 오만했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참회를 철철 흘리며 모래 바닥을 기고 나서야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테지.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멍청하고 어리석으며 오만하다. 눈앞의 선례를 무시한 채 나만은 다르겠지, 난 특별하겠지 라는 근본 없는 전제를 숭배하며 답이 뻔한 함정 속에 몸을 던진다. 그리곤 틀려먹은 대전제를 고칠 생각도 없이, 도출된 오류를 두 손 놓고 바라보며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중얼거린다. 끔찍해. 역겨워. 머릿속이 뒤집힌 것처럼 골이 울리고 흩어진 단어들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질 않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아파왔다. 간호사를 불러야 할까. 호출 버튼을 누르기 위해 시체처럼 누워있던 팔을 들어 올렸다. 흰 천장 아래서 다섯 갈래로 갈라진 언덕들이 보인다. 반지에 눌린 자국이 아직도 약지에 남아있었다. 이 흉한 것들로 네 목을 옥죄었구나. 장신구 하나 걸쳐주지 못한 그 얇은 목에 더러운 내 손자국만 가득 남겼다. 힘들다 말도 못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게 눈물을 삼켜냈을까. 이제 와서야 후회를 토로하고 널 그리는 내가 참 더럽고 불결하게 느껴진다. 그깟 눈물 몇 방울로는 네게 준 상처를 전부 가릴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자꾸만 네게 용서받길, 다시 돌아가길 욕심낸다. 미안해, 야옹아. 그 때 널 잡았더라면 너도 나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아직도 과거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내 하루하루를 채운다. 제발 다시 한 번만 돌아간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스스로가 너무도 싫어서, 값싼 동정의 눈물조차 흘리고 싶지 않았다. 네가 뭘, 뭘 잘했다고 울어. 위안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넌. 복도 끝에서 호출 신호를 들은 간호사의 슬리퍼 소리가 들려온다. 찍찍 끌리는 깔창 소리가 내게 내리치는 채찍질처럼 느껴졌다. 공허하고 무의미하지?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바뀔 리 없는 과거에 갇혀버린 채 무딘 척 웃음을 지어보았다.
울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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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낼 수 있겟...죠...? 5편 내외로 예상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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