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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logic
#8 라미네이트가 의심되는 하얀 앞니와 적당한 쇼맨십, 모든 대사마다 '그럼요'를 붙여 유쾌하게 대화를 끝내는 것. 그것이 젠틀맨의 조건이라고 버논은 생각한다. 상대방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머물도록 혼을 쏙 빼 놓는 유머와 똑같은 질문에도 웃으며 대답하는 친절. 아, 여기에 딱 소리나는 핸드 무빙까지 곁들이면 완벽하다. 적절한 센스까지 겸비해 상대방의 정신이 버논의 얼굴에 집중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버논은 늘, 자신의 우람한 팔뚝과 골이 짙은 이목구비는 남들도 다 있는 신체 구성요소라 일갈한다. 잘생겨서 좋겠다는 칭찬에는 겸손을 떨며 아이 그러지마세요- 하고 대답한다. 멋쩍게 웃어 보조개가 파인 사내의 순박한 면모를 사람들은 좋아했지만, 사실 그 자신도 첫인상이 가지는 긍정의 힘을 어느 정도 ..
#1 11번가 채프턴 씨의 가게엔 토마토가 없다. 불고기나 스파이시치킨을 메인으로 하는 가게도 아니면서, 직장인의 건강 샐러리 중 하나인 토마토를 메뉴에서 완전히 제외시켰다. 그러면 양상추나 양파를 맛있게 복아 넣어주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주간지를 성경마냥 들고 다니는 워커 홀릭들의 도시에서, 조미되지 않은 신선한 야채를 가득 담아 음식으로 내주었다. 소스도 짜거나 달지 않았다. 채식주의자를 겨냥했다기엔 고기가 많고 배를 한끼 채우기엔 조금 부족한 한 끼 식사, 그 모호한 맛에 빠져버린 매니아를 제외하고 그의 가게엔 이렇다 할 선호 별점이 없었다. 돈 주고 사먹기 아깝다는 평이 많았다. 퇴직금으로 차린 가게가 먼지만 쌓일 줄 알았더라면 그의 지인들은 필시 채프턴의 창업을 말렸을 것이라고, 연말 술자리..
분명 다시 만나도 너와 사랑에 빠질 거야. 우린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꽃이 지기 전에 나한테 말해줘, 사랑한다고! 난방을 입기엔 살짝 포근한 날씨, 비구름이 지나가 푸르기 그지없는 하늘. 딱 좋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오늘이면 된다. 그런 생각이 드니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현관에 걸린 전신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었다. 곱게 핀 뒷머리가 삐져나가지 않도록 목 뒤를 쓱쓱 눌렀다. 묵직하지 않은 시원한 향이 섞이니 좀 못나보이던 얼굴도 오늘만은 먹혀들 것 같다. 거실에 틀려진 뉴스에서 기상 캐스터는 오늘의 날씨를 얘기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이 계속 될 테니 꽃놀이를 나가보라는 승부사의 조언. 아닌 척 신중하게 골랐던 세 장의 타로 점도 지금은 필요 없었다. 눈 ..
딸각이는 소리가 진 5분을 넘게 들리지 않았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개인의 역량이라지만, 서슬 퍼런 얼굴이 감시하는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그는 감탄스러웠다. 팀원은 깨작이던 비스켓 봉투를 모니터 밑으로 살짝 숨겼다. 거울을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괜히 불빛이 반사될 것 같아 그대로 엎어만 두었다. 그는 펜이 떨어진 척 하며 한솔이 있는 쪽으로 살짝 몸을 숙였다. 일 하기 싫다며 투정 부리는 귀여운 면도 있었지만 업무를 할 때는 눈에 띨 정도로 딴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부장님의 레이더 물망에 오를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괜스레 옆에 있는 팀원의 심기만 불안해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멈춰있는 한솔의 팔을 툭 건드렸다. 평소에는 한 번만 말해도 찰떡..
엄지와 검지 자국 그대로 글이 번진 눅눅한 종이를, 원우는 용케도 쥐락펴락 하며 부채로 써먹었다. 이제는 닳을 만큼 닳아서 얼룩덜룩한 폐지인데도 꼭 그것만을 고집해서, 누가 보면 세상 중요한 일급 문서를 끼고 사는 줄 안다. 지랄 염병. 또 빡구 먹었다며 승질 내던 중 출동하는 바람에, 원우는 엉겁결에 운전대까지 쥐고 올라탔었다. 저깟 종이쪼가리도 감동실화 스토리가 있는데 나는 왜? 원우가 손으로 훔친 콧기름을 바지에 대충 닦자 승관은 더러운 짓 좀 말라며 성질을 부렸다. 날도 더워 죽겠는데 옆에 있는 사람마저 저 지랄을 떨고 있으니 승관은 관통하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좀 괜찮아질만하면 가렸던 해가 엿 먹으라는 듯 고개를 내밀고, 한풀 좀 꺾였다 싶어 몸이라도 비틀면 내가 언제였던가- 하고 가슴골 사이..
피치 못하게 자리를 비웠던 그 날 일이 좋게 마무리되진 않은 듯싶었다. 한솔이 자리로 돌아와 꺼져있던 모니터를 키자 옆 자리 팀원이 슬그머니 보고서 한 뭉치를 내밀었다. 내일까지 수정해두래요. 별 생각 없이 서류를 받아들던 한솔은 그 말을 듣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상반기 실적을 전부 다요? 한솔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지자 감기에 걸린 듯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지켜보던 팀원은 더 안쓰러운 눈빛을 하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저번에 차경 씨가 실수한 게 좀 크게 번졌나 봐요. 말이 회의지 거의 후드려 패던데요. 감기라도 걸린 것이냐 묻던 팀원은 한솔이 괜찮다며 목을 가다듬자 말을 이었다. “그 때 같이 마감 치던 새끼들 다 나오래요. 한솔 씨는 도와준 것밖에 없어서 아니라고 했는데 도통 말을 ..
“키랑 몸무게부터 잴 게요. 몸에 힘 빼고 서 계세요.” 문가에서 어중간하게 서있던 한솔은 코트를 벗고 다가왔다. 연말정산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꼭 이래야만 했는지, 담당의를 바라보는 눈길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진짜 한 명도 없을 줄은 나도 몰랐죠. 내가 다 잘못했어요. 부루퉁한 한솔의 어깨를 두드려주던 그녀는 더 이상 군말 말라는 얼굴로 신장계를 가리켰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는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한솔은 마지못해 움직였다. 혹시 방해가 될까 싶어 넥타이까지 다 벗고 기계에 올라서자 그녀는 모니터에 비친 숫자들을 빠르게 받아 적었다. “178cm에 64? 너무 마른 거 아니에요?” “그렇게 콕 집어 말씀하시면 부끄러워요.” 아차차, 내가 실수했네요. 그녀는 사람 좋은 웃음..
“승관아, 나 눈 떠도 돼?” “...” “나 무서워. 나 집에 갈래.” “...”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이건 분명 승관의 장난이라 생각하면서도, 발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움직이려할 때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 진짜 화 안낼 테니까 이제 그만해. 눈을 감고 있으니 아주 작은 소리에도 신경은 곤두섰다. 작은 팔을 대야에 담그는 소리, 끈적한 풀을 들어 올리는 소리, 벽에 무언가를 치대는 소리. 그리고 점점 많아지고 무거워지는 날갯짓. 저녁 강가에서 듣던 그런 기분 좋은 소음이 아니라, 굉장히 거칠고 서로 부딪히느라 정신이 없는 기분 나쁜 소리. 어떤 소리가 나도 쳐다보지 마. 승관은 내게 눈을 뜨지 말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든 ..
언제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아도, 축구공 하나만 있다면 온 동네 사람들의 저녁과 함께 할 수 있다. 시끄럽다며 낡은 공터 쪽으로 우릴 내몰아도 뾰족한 돌들은 늘상 길의 구석에 처박혀있다. 우락부락한 희동이네 아저씨가 길 막지 말라고 고함을 쳐도 우리는 비키지 않는다. 어른들의 자상함이란 그런 거다. 그렇게 내쫓겨서 집에 들어갔던 날, 엄마는 나를 붙잡은 채 한참을 다그쳤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괜히 가서 방해하지 마라. 아줌마 아저씨들의 그물 쪽으론 고개도 돌린 적 없다고 항변했지만 엄마는 굳게 입을 다물고 나의 답을 기다렸다. 끝이 조금 옅은, 언덕처럼 부드러운 눈썹. 그게 세모 모양이 된다며 아빠는 한 시 도망가기 바빴다. 세모는 화난 게 아니야, 속상한 거지. 네가 다칠 수도 있었단 걸 엄마는 잘 ..
“지겹지도 않냐, 비린내.” 혼탁한 바닷물에 둥둥 뜬 미역줄기가, 파도를 타고 벽에 부딪혔다. 사람들이 많이 밟아 때를 탄 바닥 위로는 썩어 버려진 물고기가 두어 마리 누워있었다. 정박한 배들이 물결을 따라 꿀렁인다. 미끄러운 장화 소리가 갑판 위를 지나치자 꽁꽁 감쳐두었던 추억이 살그머니 날아 앉았다. 하늘이 그리 맑지 않아 구름은 짙은 회색빛이었지만 사람들은 괘념치 않고 자신의 그물을 다듬었다. 새벽녘에 끝내고 온 물질에 피곤할 법도 한데 여유부리는 틈이 없었다. 1달 전에도, 1년 전에도, 5년 전에도 같은 자세 같은 얼굴로 전복의 등딱지를 갈랐을 사람들. 하얗게 머리가 쇤 노인들 틈으로 연갈색 말미잘은 고개만 주억 거렸다. 어릴 적에는 육지 밑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했다만, 그새 대가리가 굵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