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ic
[솔부] 사라진 소년 본문
[ 사라진 소년 ]
<솔부 전력 33회>
W. 콤타 (@acdemfks1234)
“나오는 음반마다 차트를 석권하는 한류 대표 버논! 많은 팬 분들께서 ‘알려주세요!’ 코너에 질문을 남겨주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을 추려 봤는데요. 4265님 외 52분께서 올려주셨습니다. 버논 씨, 왜 가수의 꿈을 가지게 되었나요?”
“하하. 사실 데뷔 초에도 많이 받았었거든요, 이 질문. 진짜 거창한 이유 없는데.”
나는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봐도 분명히 그랬다.
“노래 부를 때 마다 행복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래 할 때만큼은 그랬어요. 그 때 처음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매일 매일 제 목소리를 들려드릴 수 있으니까요.”
“에이. 저희 라디오 청취율 꽤나 높은 방송입니다. 노래가 부르고 싶었다, 춤이 좋았다 이런 뻔한 대답 말구요. 진짜 ‘아, 나는 가수가 되어야겠다!’하는 그런 계기 없으셨나요? 진짜 솔직하게! 이 라디오를 듣기 위해 밤을 세고 계신 팬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글쎄, 듣고 싶어 하던 대답은 아닐텐데. 스캔들로 오인되면 우후죽순으로 기사가 쏟아 질거고, 방송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왜 입방정을 떨었냐며 이사님께 혼날지도 모른다. 근데 내가 조금 더 걱정되는 건 나 혼자만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무얼 위해 이 곳까지 온 걸까 회의감을 느낄지 모른다.
“사실 지금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하거든요. 아, 이거 말씀드리면 진짜 팬 분들이 오해하실까봐 무서운데.”
그래도, 혹시나. 네가 날 보고 있진 않을까 작은 욕심을 내보고 싶다. 천의 확률로 날 보고 있다면, 날 알아본다면. 그렇다면 한 번 더 널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은 가수가 돼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엄청 어렸을 때 스치듯 만나서 저를 모르실 수도 있는데. 제가 그 때 다짐했거든요. 성공해서 다시 만나면 그 땐 꼭 인사하자고.”
“아 설마, 그 유명한 첫사랑인가요? 이야, 이거 의도치 않게 엄청난 대답을 들어버렸네요. 지금 게시판 난리 났습니다. 8562님, ‘헐, 오빠. 설마 애인은 아니죠?’ 아이고 팬 분들 반응 뜨겁습니다. 게시판 폭주 중이에요.”
“하하. 아니 뭐 그냥 ‘그랬었다.’는 거죠. 지금은 거의 기억도 안 나는걸요.”
아마 기억 못 하겠지. 감독도 진행자도 의외의 대답에 신이 난 모양이다. 첫사랑이냐 전 애인이냐를 두고 게시판에서 싸움이 붙었고 라이브를 듣고 계셨던지, 이사님한테 문자가 와있었다. 아마 그럴 거야. 나 혼자 구질구질하게 이러는 거겠지. 옆에 있던 작가들이 수정한 대본을 건네어 왔다. 머리가 아파 헤드셋을 벗었다.
* *
인생이 좀 굴곡졌다고 할까. 어린놈이 뭘 안다고 욕하면 할 말은 없다. 다만 또래의 20대들보다는 확실히 스릴 넘쳤다. 뭐 좋을 거 있겠냐 싶지만, 데뷔 초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코스피 뺨치는 인생 덕에 거한 이미지 포장에 성공했다. 잘생기고 능력 좋은 혼혈 아이돌. 사실은 누구보다도 아픈 상처를 지닌 여리디 여린 남자.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나름 선전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놀고먹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진행자 말처럼 청취율이 높은 라디오였던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쏟아졌다. 예상대로 첫사랑이냐 애인이냐를 두고 감성 소설들이 난무했다. 예상 외로 이사님께는 얼마 안 깨졌고 팬들도 가볍게 넘기는 듯 했다. 간혹 보이는 ‘오빠도 남자니까...’라는 글은 귀여워서 몇 번 눌러줬다. 게시글 밑에 난무하는 ‘ㅠ’자들이 사실은 쿨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며칠 후 인터뷰가 잡혔다. 이름 꽤나 유명한 잡지라던데 당사자인 저가 모르므로 그 점은 나중에 생각하겠다. 문제는 라디오에서 언급한 ‘그’ 존재가 궁금하다는 거였다. 당당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회사에서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꿋꿋하게 찾아왔고 결국 사전 녹화를 끝마치자마자 근처 카페로 끌려 나왔다. 거짓말 안보태고 근 일주일을 쪽잠으로 버텼다. 눈꺼풀은 갈 곳을 잃었고 안약 한 통을 썼는데도 눈이 따갑다. 이젠 초점마저 흐릿하다. 그런 제 속도 모르고 마주앉은 기자는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인터뷰 끝나면 소속 회사로 클레임이나 실컷 먹여주고 싶다.
“피곤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염치없지만 부탁드렸습니다. 하하”
“아 괜찮습니다. 지금이 컴백 시즌이라 좀 바빠서요.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는데 말이 좀 이상해도 잘 다듬어 주세요.”
인터뷰는 오프로 진행했다. 간단한 질문 몇 가지에 사진 3장이면 된다고 한다. 질문하는 쪽에서야 ‘간단히’지, 무언가를 짜내야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질문이던 고역이다. 차라리 앨범 컨셉이나 물어봐줬으면 하지만 이미 수십 차례 방송을 탔으니 아무래도 이 질문은 넘길듯하다. 몇 시간째 공복이었던 터라 배가 고팠다. 뭐라도 먹고 싶었지만 늦은 시간이라 알바생은 졸고 있었다. 움직일 힘도 없어 앞에 놓인 망고 주스만 쪽쪽 빨았다.
* *
Q : 이번에 발표된 앨범은 기존의 부드러웠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듯하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많이 노력했을 텐데 준비 기간 동안 힘든 점이 있지는 않았나?
A : 춤 연습이 가장 힘들었다. 평소엔 라이브에 집중을 하다 보니 격한 안무들이 없었는데, 이번 곡들은 대체적으로 강렬한 비트의 음악들이 많았다. 그에 맞는 안무를 연습하다보니 몸에 무리가 많이 간 듯하다. 그래도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다.
Q : 앨범 수록곡 중 ‘잘 자요’는 팬들을 위해 직접 작사 작곡했다고 들었다. 작곡가들 사이에서 꽤 호평을 듣고 있다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A : 아 그런가? 처음 들어보는 얘긴데 너무 감사하다. 이것저것 많이 부족한 곡인데 아무래도 예쁘게 봐주신 듯하다. 평소 늦은 스케줄까지 함께 해주시는 팬 분들이 많은데, 집에서 만큼은 이 노래를 들으며 편히 쉬셨으면 하는 바람에 만들었다. 심야 라디오에서 자주 신청곡으로 들어온다는데 아닌 척 하지만 꽤 뿌듯하다.
Q : 피쳐링에 참여한 여성 가수 분이 가까운 선후배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의외의 인맥이라 발표 당시 많이 화두에 올랐는데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궁금하다.
A : 데뷔 전에 심 선배님께서 보컬 레슨을 맡아주신 적이 있었다. 실력도 없는 게 겉멋만 잔뜩 들었다고 많이 혼났다. (웃음) 그래도 누구보다도 저를 아껴주셨고 응원해 주셨다. 자랑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목소리라고 해주셨다. 사실 그 말 듣고 연습실에서 혼자 울었었다.
Q : 이번엔 사적인 질문을 좀 해보기로 하겠다. 평소에 잠버릇이 독특하다고 들었다. 주변 친구들마저 같은 침대 쓰기를 거부한다던데 어찌 된 연유인가.
A : 이 제보자는 분명 정한이 형이다. 확신한다. 얼마 전에 같은 소속사 가수들끼리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술에 취해서 정한이 형이랑 한 방에서 잤다. 아, 오해 하시면 안 된다. 진짜 잠만 잤다. 잘 때 너무 더워서 몇 번 뒤척였는데, 다음 날 오밤중에 형을 몇 번이나 때렸다며 저를 놀렸었다. 물론 툭툭 치긴 했지만 사람 하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진 않았다. 이 소문의 절반은 부풀려져 있다. 인터뷰 끝나고 정한이 형부터 잡으러 갈 거다.
이후에도 몇 차례 대화가 오고갔다. 예상 외로 까다로운 질문은 얼마 없었고 예전에 받아 봤던 내용들이 많아 수월하게 대답했다. 내색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질문을 위해 분위기를 맞추는 듯했다. 앨범 홍보로 시작해서 연습 상황, 가까운 지인, 평소 생활 패턴. 얼추 질문이 끝나자 슬슬 본론에 들어가자는 표정이다. 이사님께선 큰소리 나지 않게 어물쩍 넘기라고 하셨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작정하고 온 듯싶다. 하긴 한창 치솟고 있는 아이돌의 사랑 이야기는 꽤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다. 잘만 구슬리면 한 달 고료는 벌 수 있을 거다.
“아, 지금 부터는 한창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그’ 주제에 대해서 질문하고자 합니다. 혹시 불쾌하시다면 가볍게 답해주셔도 좋습니다.”
빙빙 애둘러 말하지만 이 질문의 요지는 하나다. 첫사랑이냐 전 애인이냐.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냐. 안타깝게도 짜 맞춰진 각본에는 답이 없었다. 빙그레 웃기만 하니 속이 탔는지 손 위로 펜을 굴리기 시작한다. 털어놓고 말하자니 세간의 눈치가 보이고 그냥 넘기자니 기자 밥줄이 끊어질 것 같고. 남아있던 주스를 들이켰다. 어차피 칼을 뽑았다면 무라도 썰어야하지 않겠나. 정신 사납게 돌아가던 펜을 대신 내려주었다.
* *
3살. 아니, 4살인가? 아마 4살이 맞을 거다. 너무 어릴 적이라 제 기억엔 없지만 수녀님 말씀으로는 그 무렵이었다고 했다. 18년 전, 소나기가 내린다는 기상청 예보에 고아원 수녀님들이 밖에 널어둔 빨래를 걷고 계셨다. 후미진 동네에 세워진 곳이다 보니 발걸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느 날과 같이 한적했던 그 날, 일을 마치고 돌아서려는 수녀님 앞으로 외국인 한 명이 불쑥 나타났다. 근방 마을에는 6, 70대 노인 부부들뿐이었기에 낯선 이의 방문은 고아원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큰 키에 옅은 눈, 지금의 저와 똑 닮은 갈색 머리 남자는 아이 하나를 내밀었다. 당시,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없었기에 뭐라 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잘 부탁드린다.’였던 걸로 사람들은 추측했다. 수녀님이 아이를 안아들자 남자는 망설임 없이 고아원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맡겨진 4 살배기 코흘리개는 그저 사탕 하나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깟 100원짜리 불량식품이 뭐라고 제 정신을 쏙 빼놨었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만 난다. 허나 딱 한 가지 웃어넘길 수 없었던 건, 아직까지도 제 아비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부모님을 원망하진 않았다. 다만, 미워한 적은 있었다. 특히 운동회 때 부모님이 오시는 친구들을 보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던 적이 많았다. 사춘기 때는 급격히 말수도 적어져서 고아원 사람들이 많이 걱정했었다. 그러나 당시의 저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거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잘난 거 하나 없는 고아. 심지어 남들 다 있는 가족 하나 없다며 자기 자신을 사지로 밀어 붙였다. 저를 피붙이처럼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랬는지. 단순한 질풍노도의 시기로 치부하기엔 곪아버린 상처가 너무 많은 애송이였다.
* *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중충했던 하늘이 결국 비를 쏟아 냈다. 하필이면 가방이 무거워 우산을 두고 온 날이었다. 걸어가려면 족히 30분은 걸렸기에 이도저도 못하고 현관에 발이 묶여버렸다. 아무리 고민 해봐도 뛰는 건 싫었다. 젖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냥 그칠 때까지 기다리자며 주저앉았을 때, 하얀 운동화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건 또 뭐야. 시선을 위로 옮기자 동글동글하게 생긴 남자아이가 보였다. 약간 큰 와이셔츠에 평범한 검은색 가방. 자그마해 보이는 손엔 우산이 들려져 있었다. 저가 쓸 하늘색 우산 하나, 내게 내밀고 있는 노란색 우산 하나.
하교하는 동안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누군가와 같이 걸어본 적이 없었기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당황한 저는 보이지 않는지, 동글동글한 그 녀석은 연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명찰은 왜 안 달고 다니는 건지.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는데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저기’는 너무 그렇잖아. 친구니까 ‘야’가 맞는 건가? 갈래 길이 나올 때까지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고아원은 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걸어가야 나온다. 오른쪽은 마을 안쪽으로 이어지는데 딱히 가 본 적은 없었다. 쭈뼛거리는 저를 눈치 챘는지 슬쩍 돌아본다. 우산 고마워. 시선은 땅바닥에 둔 채로 웅얼거렸다. 제 말이 안 들렸는지 미간이 살짝 찡그러졌다. 우산 고맙다고. 한 번 더 말해주고 싶었는데, 낯선 어색함에 입도 못 떼고 애꿎은 땅만 노려보았다. 그런 저를 이해하는지 빙그레 웃고는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름이라도 물어보고 싶은데.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게 욕심도 많다. 작은 보폭에도 성큼 성큼 걷는 폼이 계속 우물쭈물 거렸다간 놓쳐버릴 것 같았다. 목구멍에 가시라도 박힌 걸까, 입안에서 멤 돌던 말을 힘겹게 내뱉었다. 문자 그대로, 내뱉었다.
‘노,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처신머리 없던 행동에 쪽팔림이 앞선다. 등신아 왜 그랬어. 왜. 노래 좋아하면 어쩔 건데. 네가 불러주기라도 하게? 고아원으로 향하던 내내 저의 멍청함이 부끄러워 한 동안 방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쪽팔림과 한탄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그 날 저녁까지 굶었더랬다. 아, 호구야. 진짜 왜 그랬어.
그럼에도 실실 웃음이 났던 건, 제 멍청한 질문에도 살포시 고개를 끄덕여줬었기 때문이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울타리 너머로 사라질 때 까지 발에 못이 박힌 듯 서있었다. 아마 친구를 사귄다면 이런 감정이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울리는 둥둥 소리에 잠은 다 잔 듯했다. 내일은 꼭 고맙다고 해야지. 그리고 이름이 뭔 지, 어디 사는지 꼭 물어볼 거다. 친구하자는 말은 웅얼거릴게 뻔하니 최대한 미뤄두도록 하겠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학교로 내달렸다. 아침잠이 많아 매번 아슬아슬하게 등교 했었는데, 오늘따라 여유 있는 시계 침에 저 스스로가 기특하다. 조례가 시작하기 전 교무실에 들러 선생님을 찾았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필시 이 학교 학생일터였다. 음침한 분위기만 내던 학생이 갑작스레 출석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선생님도 놀라신 듯 했다. 몇 번 눈을 끔뻑이시더니 곧 전교생 반명함이 끼워진 파일을 건네 주셨다. 1학년부터 3학년 까지 꼼꼼하게 사진을 훑어 봤지만 그 애와 닮은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혹시 전학이라도 간 걸까 싶었지만 최근에는 교외 이동 기록이 없다며 고개를 내저으셨다. 근방에서 한번이라도 마주치길 고대했건만, 1년 남짓한 시간동안 그 동글동글했던 얼굴을 다시 볼 순 없었다.
정갈하게 접힌 우산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그 때 네 이름을 물어 봤다면 이렇게까지 후회하진 않았을 텐데. 아닌 척 했지만 눈꺼풀 아래로 꾸역꾸역 눈물이 새어나왔다.
* *
에어컨 소리가 멈췄다. 이윽고 물소리가 들리더니 알바생이 뒷정리를 시작했다. 이미 12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대충 마무리 하자는 저의 말에 기자가 화들짝 놀란다. 어떻게 각색 될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나쁘게 적히진 않을 듯싶어 마음이 놓였다. 얼굴 팔린 연예인은 상관없다만, 추억이랍시고 저도 모르는 얘기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썩 유쾌할 리 없지 않은가. 옆에 널브러져 있던 자켓을 걸쳤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찬 공기가 와 닿았다. 겨울인가. 가방을 챙기느라 허둥거리던 기자가 뒤따라 나왔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계속 어물쩍 거린다. 그 때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짜증나고 답답하고. 아마 그랬을 거다. 그 땐 심지어 바가지 머리에 안경까지 끼고 있었으니 얼마나 웃겼을지 상상이 간다. 대충 인사를 마치고 매니저 형을 불렀다. 이 상태로 운전까지 했다간 다음날 9시 뉴스에 얼굴 실릴지 모른다.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는데 옆에 서있던 기자가 슥 흰 종이를 내밀었다.
“제가 얼마 전에 강원 쪽에 출장을 갔다 왔었거든요. 기업 후원을 받은 복지원들을 취재하러 갔었는데, 거기서 버논 씨 또래의 남자 분을 인터뷰 했었어요. 제 착각 일수도 있지만 그 복지사 분도 비슷한 얘길 해주셨거든요. 그 때….”
내밀어진 종이에는 휘갈겨 쓴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기자 말로는 얼마 전 인터뷰했던 남자가 저와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는 거다. 학창시절에 우연히 만났던 친구가 고아원으로 걸어가는 걸 봤었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될까 걱정했고 그 때 처음 복지사가 되겠다는 꿈을 꿨다. 항상 그늘진 얼굴이 신경 쓰였다고, 이름조차 모르고 헤어진 게 너무 미안했다고. 그 뒤로도 말이 이어졌지만 기억나진 않는다. 그냥 종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네가 맞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걸 다 내버려둔 채 널 찾으러 가야 할까. 꿈처럼 만난다 한 들 네게 뭘 말해줄 수 있을까. 그냥 우산을 되갚으러 왔다는 말은 싫다. 단순한 고마움의 감정이 아니란 걸 저는 이미 알아버렸다.
널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머니 안으로 종이를 꾸겨 넣었다. 구겨진 종이 위로 설핏 글자가 비쳤다.
‘부 승관. 강릉 보육…’
▶ 처음 써 본 전력인데 이것 저것 많이 부족하네요. 좋은 주제 주신 솔부 전력님 감사드립니다. 예전부터 생각한 주제였는데 역시 글쓰는게 쉽지가 않군요. 서로의 꿈이 바뀐 소년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아이와 복지사를 꿈꿨던 아이. 서로를 만난 후 바뀌게 된 인생. 후편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더 풀어내야할지를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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