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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부] 너의 이름은 上

콤타 2018. 6. 1. 22:00

[솔부] 너의 이름은

W. 콤타 (@comtar34)

 

* 영화 너의 이름은을 보고 진짜 너무 좋아서 씁니다.

* 스포일러 소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마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빨갛게 부어오른 거야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지만 쿡쿡 쑤시는 게 영, 아침부터 좋은 스타트는 아니었다. 잠버릇이 거칠긴 했어도 굴러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바닥을 딱딱한 원목으로 하니 이런 불상사가 생기는 거다. 코가 눌려 숨 쉬기가 불편했다. 목만 움직여 숨통을 틔웠다.

 

  볼과 배에 닿는 시원함에 아픔도 잠깐, 스르르 눈이 감겼다. 뽀송뽀송한 침대와 목이 늘어나 편안한 잠옷. 에어컨을 틀어놨는지 쨍한 8월의 방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벋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쾌적했다. 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좋은 곳에 살다니, 복 터졌네. 털털 거리는 선풍기로 한여름을 나는 승관에게 이 정도는 사치 중에 사치였다. 집에 에어컨도 없지만, 엄마는 있어도 못 틀게 했을 거야, 분명. 다시 몸을 일으켜 푹신한 침대가 있는 곳으로 기어 올라갔다. 하얀 이불을 두른 건 꼭, 살찐 누에 같았다.

 

  잠깐,

  침대?

  에어컨?

 

  내 방에 그런 게 왜 있지?

 

  다시 쏟아지는 잠에 취하려던 승관은 번쩍, 눈을 떴다. 손을 뒤척여 옆에 있는 물건을 아무 거나 집었다. 검은색 자명종. 푹신한 침대와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시계가 승관을 반겼다. 7시 반을 가리키는 시침과 분침은, 멈추지 않고 길을 달렸다. 어라? 이게 뭐야? 이, 이, 이게 뭐야?

 

  까치집이 된 머리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깔끔한 액자와 인테리어용 꽃이 놓여있는 깔끔한 테이블. 그 뒤로 한참은 걸어야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3단 옷장이 놓여 있었다. 원문 서적이 가득한 책장. 평소 나루토나 원피스를 처박아 두던 제 책장이 아니었다. 저것만큼 크지도 않았고. 아니 애초에, 저는 책상에 저런 고급형 노트북을 놔둔 적이 없고 때맞춰 울리는 아이폰을 구경해 본 적도 없었다. 뭐야? 나, 나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승관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해. 제가 이런 곳에서 자고 있던 것도 이상하고, 묘하게 시선이 위로 높아진 것 같은 위압감도 낯설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식은땀이 베인 손을 내려 보는데, 아무리 봐도, 수천 번을 다시 봐도, 하얗고 핏줄 굵은 팔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저는 좀 더 얇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그런 팔 인데, 이 몸은 대체. 기다란 손가락을 펼쳐 보는데, 그 밑으로 보이는 다리는 더 가관이었다. 뭐야 이 징그러운 다리털은?! 매일 로션까지 발라주며 관리하던 매끄러운 피부는 어디가고, 웬 밀림의 숲이 펄쳐져있었다. 이게 뭐야, 대체 이게 뭐냐고?!

 

  방을 뛰쳐 나와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사람이라면 방에 거울 하나쯤은 놔두지 않나? 학교 가기 전에 매일 교복 폼을 쳐다보던 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었는지, 방에 있는 거라곤 딱딱한 가구들과 가끔가다 집어 먹을 수 있게 담아둔 작은 초콜렛들이 다였다. 여기 사람 사는 집 맞아?! 무슨 촬영장도 아니고, 왜 이렇게 넓어?! 2층으로 추정되는 이곳엔 이상하게 화장실이 없었다. 아니 그럼 볼일은 어디서 보는 거냐고, 밤마다 1층까지 내려가서 본다는 거야?! 그릇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에, 승관은 함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저기 사람이 있다는 건데, 지금 이 꼴로 누군가를 마주쳤다간 답도 없는 상황에 엮여 버릴 게 분명했다. 이 몸이 대체 누구 건지도 모르겠는데!!!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승관은 후다닥 방으로 돌아갔다. 맨발이니까 발소리 안 났겠지? 매일 발에 힘 줘서 걷는다고 꾸중을 듣는 바람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어떡하지? 어떡해? 여기로 들어올 것 같은데?! 안절부절 하는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던 승관은, 아까는 보지 못한 다른 문이 있는 걸 확인했다. 일단, 일단 저기로 들어가자! 그리고 생각이란 걸 하는 거지. 꽁무니가 빠지게 문고리를 잡아 젖혔다.

 

  뭐야, 대체 왜 방 안에 화장실이 있어. 미친 거 아냐? 피똥싸게 달리던 제가 불쌍해질 정도로, 깔끔히 청소된 화장실이 승관에게 인사했다. 심지어 조명도 은은하게 예뻐, 짜증나게. 순간 승관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 방만한 넓은 화장실에 눈이 갔다. 와, 이런 데서 맨날 씻고 자고 하는 건가? 미쳤다. 미쳤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화장실 벽을 쭉 둘러보는데, 세면대 위의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거울 속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세상 처음 보는 잘생긴 얼굴로.

 

  “도련님, 안에 계신가요? 곧 학교 가실 시간입니다.”

  “네, 네?! 깨, 깼어요! 들어오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 평소랑 다른 상황에 의문이 든 여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화, 화장실에 있어요! 다급히 덧붙인 말에 여자는 곧 수긍하는 듯, 알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럼 준비되시면 내려 오세요. 아침 만들어 두었습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멀어지자 승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좀만 더 있게 했다간 진짜로 들킬 뻔 했어. 체한 것을 다 소화시켜낸 사람 마냥, 일단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 거울 속의 얼굴은 아까와 똑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금발과 짙은 쌍꺼풀을 가진 눈. 또렷한 이목구비와 하얗고 길쭉한 쇄골까지. 잘생긴 얼굴부터 늘어난 목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몸까지, 전부 자신이 알던 ‘승관’이 아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      *

 

 

 

 

 

 

  “자습. 나눠준 문제지는 내일 모레까지 풀어올 것”

 

  아이들의 원성어린 목소리에도 늙은 남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해. 나이가 몇 인데 아직도 찡찡거려? 안마를 위한 건지 교탁을 때리려고 들고 온 건지, 테이프를 칭칭 감은 대나무 안마기로 아이들에게 괜한 겁을 주었다. 그럼 제출 날짜만이라도 늦춰주세요, 내일까지 수학 과제도 내주셨잖아요. 한 여자 아이가 조그만 목소리로 항의하자, 그 앞까지 걸어가서는 탕-하고 막대기를 내려쳤다. 큰 소리가 나자 놀랐는지 여자아이는 사색이 되어 눈을 내리 깔았다. 지금, 불만 있나, 김 지은? 교사, 나이 많은, 남성, 불공정한 점수를 줄 수 있는 교단의 위치. 어린 아이를 하나 입 다물게 하겠다고 자신이 가진 모든 불량 패를 꺼내보이는 남자는, 아무리 봐도 완벽한 쓰레기였다. 죄송하다는 말이 들려오자 남자는 발을 떼고 반을 나섰다. 저런 놈도 교사라고 애들을 가르치네.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것도 이젠 넌더리가 났다. 대체 이 녀석은 왜 이런 꼴통 학교를 다녀서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거야? 눈썹을 꿈틀거리던 아이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내일 국어 모의고사가 있는데.

 

  “야 승관아, PC방 안 가?!”

  “안 가. 너네끼리 가.”

  “부, 요즘 왜 이래? 왜 이렇게 나약해졌어? 어디 아프냐?”

 

  아니, 안 아파. 그러니까 그냥 너희들이나 가서 놀아. 싸한 얼굴로 돌아서자 친구들로 추정되는 무리들은 곧 입을 닫았다. 야, 아무리 그래도 말을 그렇게 하냐?! 싸가지 없는 놈! 뒤로 들려오는 항의의 목소리가 몇 차례 들렸는데 그냥 고이 씹어주었다. 나는 지금 너 같은 새끼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어. 이를 바득바득 가는 갈색 뒤통수는 동그란 얼굴과 달리 엄청난 성깔과 분노를 보여주었다. 자그마한 키로 세상을 짓밟을 듯한, 그런 위엄을 토했다. 친구들은 평소와 다른 승관에 당황했고, 왜 하필이면 오늘이냐며 짜증내는 승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남자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고, 이름은 부 승관이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수업 끝나자마자 PC방 가기를 좋아하며, 얼빠진 녀석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매일 떡볶이나 햄버거 따위를 사먹는, 딱 전형적인 고등학생이었다. 아, 끔찍해 어떻게 이딴 새끼랑 내가.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아 황급히 머리를 털었다. 좋은 거라곤 학교랑 집이 가깝다는 것뿐이었다. 진짜 좆 만한 동네였다, 여기는.

 

  집으로 돌아온 승관은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엄마한테 인사도 안 하냐, 이 놈아?! 안쪽에서 들려오는 굵직한 소리에 승관은 뜨끔, 어깨를 움찔했다. 다, 다녀왔습니다. 기어가는 목소리를 용케 들으셨는지 올라가보라는 답이 연이어 들려왔다. 잘 넘겼다, 한솔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작은 계단으로 발을 얹었다. 저번에는 요즘 사춘기가 왔는지 부모한테 인사도 없다고, 얼굴도 제 부모도 아닌 사람에게 한창 잔소리를 들었다. 저는 그 때 정신이 나가, 여기가 어딘지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책상에 주저앉았다. 저 꼴통 학교만 갔다 오면 이상하게 진이 빠졌다. 애들이 질이 떨어져서 그런가, 몇 마디 주고받지 않는데도 힘이 들고 하루가 피곤했다. 아마 이 아이는 자신보다 곱절은 체력이 떨어지는지, 조금만 피곤하게 몸을 움직이면 저녁에 골골 거리며 드러누웠다. 진짜, 까탈스럽고 피곤한 몸이 아닐 수 없다. 잠깐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 자세를 고쳐 잡았다. 최 한솔, 네가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네 몸으로 돌아가야 할 거 아냐. 정신 안 차려?! 따가운 말로 자신을 채찍질 하며 책상에 몸을 앉혔다. 엉망진창으로 적어놓은 글자들. 공책 안은 여러 사람이 급히 적은 것처럼, 정신없고 규칙성도 없었다.

 

  이 아이와 몸이 바뀐 지는 근 이주일 째였다. 주기는 불규칙했지만, 적어도 일주일에 두 세 번꼴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답답하고 텅 빈 집이 싫어서, 늘 같은 답만 내뱉는 부모와 소름끼치는 일상이 지긋지긋해서, 그래서 이런 꿈을 꾸게 된 줄 알았다. ‘이제 그만 벗어나게 해 줘. 짜증난다고! 저 좆같은 집구석도, 사람들도!’ 이제 그만 끝내달라는 푸념만 질러대니 저도 모르던 자기 방어기재가 발동한 것 아닐까 생각했다. 분명 꼬집은 볼이 아팠지만 꿈속에서도 아플 수 있는 거 아닌가.

 

  넌더리가 나는 하루 끝에 지쳐버린 나머지,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자 자신은 이 정체모를 녀석의 몸에 들어와 ‘승관’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다. 대체 이 녀석은 누구야?! 땀이 빗물처럼 흐르던 8월의 한여름 밤에, 나는 이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잘 자던 여동생이 오빠 괜찮냐며 문을 여는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존재가 제 방에 들어왔다는 것에 놀라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울면서 뛰쳐나갔고, 곧이어 올라온 여성에게 죽도록 맞았다. 사람이 이렇게 힘이 셀 수 있어? 맞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린다는 여자의 말과 함께, 다음 날 다리를 움직이는 게 불편할 만큼 처 맞았다. “처”맞았다.

 

  줘도 못 입을 작은 사이즈의 교복은 이 녀석에게 딱 맞았다. 저와 달리 말랑말랑한 살과 차분한 갈색 머리를 가진 아이. 누구의 눈에도 튀지 않을 평범한 외모에 정은 안 가지만 나름 귀여운 여동생도 있었다. 복 터진 새끼네 이거. 승관에 대해 하나씩 알아갈수록, 저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 아이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웃기다. 얘는 자기 이름으로 된 폰 하나 없는 거지새낀데 말이다. 버스가 한 시간에 1대씩 있는 시골 깡촌에 살면서, 온갖 인터넷 게임은 다 섭렵하고 있었다. 한 페이지도 풀지 않은 수학 문제집과 전 지문이 틀려있는 비문학 책. 아침마다 지각을 밥 먹듯이 했는지, 정갈한 얼굴로 시간 맞춰 등장하면 교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저를 반겼다. 정말로, 쪽팔려서 죽고 싶었다.

 

  처음 이런 변화를 눈치 챈 것은 저쪽이었다. 나는 정말로, 한참 동안이나 꿈을 꾸는 줄 알았으니까. 이런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꿈이 내 소원을 들어줬나보다 가벼이 넘겼다. 크게 뚫린 방충망을 테이프로 급하게 막아두고 남은 숙제를 하는데, 뒤에서 7번째 장, 컴퓨터 사인펜으로 급하게 쓴 듯한 날림 한 줄이 적혀있었다.

 

  너 대체 누구야?!

 

  그때는 정말, 머리로 망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누가, 누가 이런 장난을 친 거지? 같이 어울려 다니던 떨거지들이 그런 건가? 그러나 평소 펜이라곤 잡지 않는 그놈들이 굳이 승관의 노트를 뒤적이며 이런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을 리 없다. 최근 들어 계속해서 바뀌는 몸, 덩치는 작으면서 목소리는 더럽게 큰 그 녀석. 성급하지만 많은 의미를 담은 짤막한 한 줄로 이 상황을 깔끔히 정리해놓았다. 이건 분명 승관이 남긴 글이었다.

 

 

 

 

 

 

      *      *

 

 

 

 

 

 

  그러니까, 제발 용돈 좀 작작 쓰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해?!

  쓰는 만큼 일 하잖아! 어차피 다 네가 먹는 건데 왜 승질이야, 이 쫌생이 같은 녀석아!!!!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그 날부터, 서로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고 일어나니 얼굴에 욕이 써져 있어서 다음번에 만나면 부숴버리겠다고 이를 갈기도 했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면 친구들은 어제 일이 기억 안 나냐며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고, 엄마와 동생은 가자미눈을 뜨고 저를 쳐다보는데 정말 미쳐버릴 뻔했다. 이 불안정에 더는 적응하기 싫어서, 그 녀석의 방에 작은 공책을 두고 하루 일과를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오늘 나는 네 몸으로 뭘 했고, 뭘 먹었고, 무슨 과제를 받았고(물론 네가 할 거지만) 알바를 몇 분 늦었다. 누구도 만났고, 누구랑 떠들었다. 이렇게 얼추 정리해서 다이어리를 적어두니 녀석도 어느 순간부터 제 몸을 통해 벌린 일들을 상세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누가 PC방을 가자고 해서 거절했다, 햄버거를 대체 왜 사먹는 거냐, 돈 아껴 써라 등.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열심히 적어줬는데 너는 이딴 잔소리만 써?! 순간 빡침이 정수리를 두드렸지만, 녀석의 편협한 성격에 이 정도면 양반이라고, 그냥 웃어 넘겼다.

 

  한솔이라는 이 녀석은 성적이, 머리가 진짜 끝장나게 좋았다. 다니는 학교도 동네에서 명문으로 손꼽히는 학교였고 걸치고 다니는 옷이나 신발들도 죄다 명품이었다. 지금 쥐고 있는 이 아이폰도 저번 달에 나온 신형인 걸 보면, 이 녀석은 정말, 잘난 신체와 부를 모두 겸비하고 있었다. 아, 재수 없어. 방 안에 노트북이 있으니 굳이 PC방을 찾아 헤멜 필요가 없어서, 그거에선 플러스 점수를 줬다.

 

  방 안에는 늘 알 수 없는 풀이식이 가득한 문제집과 영문 서적이 가득했다. 처음 바뀌었던 그 날도, 밤새 공부를 했던 것인지 책상에는 볼펜과 문제집들이 얽혀있었다. 순간 수능을 앞둔 고3인가 싶었지만, 이 녀석은 그냥, 학교에 꼭 하나씩은 있는 열성적인 전교 우등생이었다. 심지어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약간 자괴감이 들었다. 열심히 일기를 적고 뒷장으로 넘기자, 다음 날 모의고사가 있으니 꺼내둔 정리서를 읽고 자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물론 그딴 걸 읽었을리 없고, 그 아이의 시험을 시원하게 말아먹어 주었다. 곧장 교무실에서 한솔을 소환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안 갔다. 아이들은 한솔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한 얼굴을 했고 요즘 사춘기가 온 거냐며 한솔의 아버지는 제게 승질을 부렸다. 아닌데요! 그냥 공부하기 싫어서 안 한 거예요!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답해드렸는데, 그날 죽도록 쳐맞았다. 진짜 폭력이란 이런 거였다.

 

  얘는 좀, 성격이 더러웠는지 친구가 없었다. 여기서 뭘 필요로 하고 무슨 수업을 듣는지 알 리가 없으니 준비물을 두고 가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빌려주겠다고 나서는 친구 한 놈 없었다. 다들 차가운 눈으로 ‘네 거 쓰면 되잖아.’라고 답했다. 아니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굳이 물어봤겠니?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탁했지만, 다들 싸늘한 얼굴로 가던 길을 걸어갔다. 물론 저렇게 예의 없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이 원초적인 잘못이었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니 한솔이라는 애가 어떤 애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얘는 아마, 사회생활이 0점을 넘어 마이너스인 놈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곧장 식당으로 달려갔다. 지갑에 돈이 이렇게 많은데 굳이 알바를 할 이유가 있나?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리고 있나 싶었지만, 뭐, 부자아이의 사회생활 투쟁기라고 마무리 지었다. 화요일, 금요일마다 수업이 끝나면 칼같이 버스를 타러 달려갔다. 성격은 구리지만 성실함은 만 점 이었는지, 처음 길을 몰라 헤매었을 때 네가 어쩐 일로 늦게오냐며 오더가 짜증보다는 신기함을 내비췄다. 하하, 그러게요. 제가 너무 피곤했나 봐요. 할 말이 없어 환하게 웃어보였는데 그는 정말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좀 웃고 다녀 이 녀석아.

 

  그날따라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잠시 문제가 있었다. 부모와 함께 손을 잡고 온 5살짜리 꼬마아이가 유난히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날이었다. 부모는 애가 뭘 원하는지 몰라 아등바등 하고 있었고 아이는 어른들이 당황할수록 더 큰 목소리로 울어 제꼈다. 처음에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부부를 쳐다봤지만, 그 상황이 15분이 넘어가니 슬슬 조용히 시키라는 짜증이 들려왔다. 둘은 연신 죄송하다며 금방 조용히 시키겠다고 말했지만 아이는 그럴 때마다 더 우렁차게 칭얼거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잔뜩 심통이 나있었다. 부부는 이제 울기 직전이었다.

 

  “애 관리도 못 할 거면 데려오질 말았어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지금?! 조용히 안 시켜?!”

 

  배가 불룩 나온 한 중년의 남성이, 아이가 있는 테이블을 향해 소리 질렀다. 부모는 죄송하다며 식사도 하지 못한 채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유아용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 지른 남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미운 존재인지 보여주었다. 안쓰러웠다. 결국, 매니저님이 소환되었고 아이를 내보내라는 다른 손님들의 성화에 못 이겨 부부에게 정중히 말을 건넸다. 환불해 드릴 터이니 아이를 데리고 나가주세요. 물론 내가 평소에 잘 나대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건 일개 아르바이트생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돈을 내고 시간과 음식, 서비스를 구입한 저 사람들도 전부 이 가게의 손님이었고 불편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저기, 제가 한 번 안아봐도 괜찮을까요?”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동생이 있어서 아이는 좀 볼 줄 알아요. 식사 하시는 동안 제가 보고 있을 게요!”

 

  트레이를 내려놓고 부부에게 향했다. 제 말에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이미 짜증이 날 대로 난 사람들 앞에서 계속 말로 끄는 것 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나았다. 제가 번쩍 아이를 안아들자 부모는 당황한 얼굴이 되어 가만있지도,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지도 못했다. 짜증이 가득 난 아기는 제가 끌어안자 몇 번 발버둥 쳤지만, 점차 진정이 되었는지 울음을 멈추고 손가락을 입에 물기 시작했다. 혹시 애기 쪽쪽이가 있나요? 제 말이 부모는 화들짝 주머니를 뒤지며 주황색 쪽쪽이를 꺼냈다. 애기 입에 물려주자 아이는 온순한 얼굴이 되어 제 부모를 쳐다보았다. 애가 자꾸 쪽쪽이만 물고 밥을 안 먹으니, 그것을 뺏은게 화근이 되었나보다. 약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그냥 멋쩍은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 동생도 어렸을 때 밥을 진짜 안 먹었는데, 배고플 때 먹게 놔두니 잘 먹더라고요. 굳이 억지로 안 먹이셔도 되세요. 쪽쪽이 뺏으면 화만 내요.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다시 자신의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가 부딪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커지자 싸늘했던 가게 분위기는 다시 은은한 재즈를 타고 춤췄다. 매니저는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어디서 그런 걸 배웠느냐며 수고했다고 했다. 딱히 한 건 없는데요 뭐. 아이와 부모는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갔고 저도 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갈 수 있었다. 꽤 괜찮았지, 나?!

 

  그 때 나 진짜 엄청 놀랐다고 ㅠㅠ 사람들이 얼마나 화를 내던지. 그래도 잘 마무리했으니까 걱정 하지마! 매니저님이 보너스 주신다면 거절하지 말고 받아둬! 나중에 나 케이크 사먹게. 내일 모레까지 영어 번역 과제 있다더라. 너네 학교는 뭔 숙제를 이렇게 많이 내주냐? 적당히 하고 자라.

 

  1시에 조금 가까워지는 저녁, 대충 일기를 마무리 하고 침대에 누웠다. 얘는 진짜 무슨 야망을 이루겠다고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거지? 대단하다 대단해. 베개에 좀 더 깊게 고래르 파묻는데 창밖의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끝내주는 풍경과 끝내주는 인테리어를 가진 집. 부족한 것 하나 없는 가정에 살면서 이 아이는 많은 외로움을 안고 있었다. 학교에선 힘들지 않아? 누가 괴롭히면 여기다 적어줘, 내가 혼내 줄게!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의 배려뿐이라, 일부러 더 밝게 글을 마무리했다. 잘 자 한솔아. 나중에 또 보자. 내일의 너를 위해 30분 일찍 알람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정말, 정말로 달콤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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