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ic
[솔부] 로맨틱 블루 본문
#1
11번가 채프턴 씨의 가게엔 토마토가 없다.
불고기나 스파이시치킨을 메인으로 하는 가게도 아니면서, 직장인의 건강 샐러리 중 하나인 토마토를 메뉴에서 완전히 제외시켰다. 그러면 양상추나 양파를 맛있게 복아 넣어주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주간지를 성경마냥 들고 다니는 워커 홀릭들의 도시에서, 조미되지 않은 신선한 야채를 가득 담아 음식으로 내주었다. 소스도 짜거나 달지 않았다. 채식주의자를 겨냥했다기엔 고기가 많고 배를 한끼 채우기엔 조금 부족한 한 끼 식사, 그 모호한 맛에 빠져버린 매니아를 제외하고 그의 가게엔 이렇다 할 선호 별점이 없었다. 돈 주고 사먹기 아깝다는 평이 많았다. 퇴직금으로 차린 가게가 먼지만 쌓일 줄 알았더라면 그의 지인들은 필시 채프턴의 창업을 말렸을 것이라고, 연말 술자리에서 농담을 주고 받는다. 그럴 때마다 꼬장한 60대 노인은 신문을 폈다. 두께가 1mm도 되지않는, 조악한 방패막이를 앞으로 내세웠다.
지하철에 들기 전, 스타박스 대신 처음 채프턴의 가게에 들른 손님들은 토마토를 넣어줄 수 있냐 물었다. 양파를 볶아 고소한 버터 내음을 더하고 추가금을 내도 좋으니 소스도 추가해달라 부탁했다. 지갑을 뒤적이는 손님 앞에서, 채프턴은 얼마 남지 않은 수염을 베베 꼬며 받은 지폐를 그대로 내밀었다. IC 카드도 안 받는 촌스러운 가게에 요구사항이 너무 많다고 했다. 지갑을 뒤적이던 남자는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간다. 노인은 익숙한 양 싸구려 커피만 홀짝였다. 요란한 종소리와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한 차례 지나가고 가게는 다시 조용하다. 약속한 시간까지 10분 전, 남자는 느긋하게 손을 씻고 오븐을 예열했다. 가장 크고 잘 구워진 빵을 갈라 따끈한 오븐 안에 넣었다.
"날이 좀 춥네요."
"오늘부터 한파니까. 그런 코트론 오늘 내일도 못 버텨."
"뭐 어때요 지하철 타면 따듯한데."
"젊어서 죽지."
"늘 먹던 걸로 부탁해요."
남자는 이골이 난 얼굴로 칼을 든다. 미리 씻어둔 양파를 얇게 썰고 남자가 좋아하는 아보카도를 슬쩍 꺼내 상추 위에 올려주었다. 토마토는 없지만 아보카도는 있는 가게. 버논은 채프턴의 변덕이 언제가 가게를 문 닫게 할거라 조언했지만, 노인은 사내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골목 구석 요리집이 사라진다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먹기 싫으면 빼지. 노인의 단호한 한 마디는 종알거리던 버논의 입도 단숨에 틀어막을 수 있었다.
"공원 만든다면서요? 오는 길에 게시판 봤어요."
"그것 때문에 매 주말이 지옥이야. 허구헌 날 드릴 소리라고."
남자는 갈색의 소스를 휘휘 젓는다. 데워진 빵 한 쪽에 나이프로 바르며 툴툴 거린다.
"집값 뛰고 좋지 뭘 그래요. 까다롭기는"
"그래봐야 손바닥만한 집이야. 조만간 처분하게 생겼구만."
"그러니까 메뉴 좀 손보랬잖아요. 이런 샌드위치 누가 사먹는다고."
포장지를 퍽퍽 구긴다. 푸짐하게 채소를 올리고 빵 뚜껑을 덮는 손이 거칠다. 버논은 그가 짜증 난 걸 알면서도 부러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 식은 블랙커피를 개수구로 버리는 모습이 제 할아버지와 똑같다.
"시끄러. 얼마 팔아주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매일 얼굴 보러 오잖아요."
"말이나 못 하면."
자그마한 통에 소스를 담는다. 다른 이들에겐 없던 인심이 유달리 버논에겐 후하다. 밋밋한 흰색 봉투에 샌드위치를 담아 내밀자, 버논은 지하철 탈 때 쓰던 파란색 카드를 내밀었다. 채프턴은 툴툴 거리며 카드를 받았고 곧이어 삐릭, 결제 완료 됐다는 문자가 뜬다. 런치 바베큐가 유명한 프렌차이즈점 사이에 단촐한 8달러가 떠다닌다.
#2
"재고 받은 거 확인했어?"
"아직. 택배 2시 넘어서 올 거야."
"이런. 이따 1시에 예약 잡아 놨는데."
"좀 늦게 오라 그래."
버논은 물고 있던 가글을 뱉었다. 문자 남기느라 오래 물고 있었더니 앞니가 시큰하다. 혀까지 얼얼해지는 파란 리스테린을 뱉고 물을 한 모금 머금는다. 어금니 구석구석 웅얼거리고 있으니 조슈아가 대신 장부를 열었다. 11월 13일, 입고 지연. 파란 펜으로 메모를 남기고 밑줄까지 쫙쫙 긋는다. 노트북을 켜서 잔고에 노란 바탕색까지 채운 후에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다. 넌 너무 까다로워. 물기를 훔치던 버논이 말하자 조슈아는 화면을 덮었다. 그도 그의 꼼꼼한 성정이 과해질 때가 있음을 알지만 버논에게 맡길 바에야 혼자서 이틀 밤을 지새우는 게 속 편했다. 그리고 넌 너무 무관심하고. 파란 펜을 중지와 약지 사이에 껴보였다. 버논은 조슈아의 밋밋한 개그를, 꺽꺽 거리며 좋아한다.
버논과 조슈아가 운영하는 가게는 그래봐야 두 뼘이었다. 앞서 들른 샌드위치 가게만치 작았다. 버논은 노인의 가게는 조만간 타일벽과 함께 무너질 것이라며 되도 않는 농담을 했지만, 오십보 백보, 그의 가게 또한 바퀴벌레 시체가 창고 안에서 매일 나올만큼 낡고 닳은 건물이었다. 빗자루가 쉴 틈이 없었다. 그의 삼촌은 변색된 회벽을 일컬어 문화재라 칭했지만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난림에 단열처리도 제대로 안 된 짝퉁 유럽식 건물이라 말했다. 그럼에도 손님은 간간히 있어서, 얼마 남지 않는 마진에도 중고 핸드폰 가게를 착실히 꾸려나갔다. 버논은 미술학을 전공했고 조슈아는 회계 유망주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둘은 휴대폰 가게에 앉아 나이든 중년 부부를 상대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런 게 인생이지! 버논은 조슈아의 인스턴트 커피에 설탕을 가득 부으며 말한다.
삐뚫어진 액자를 걸고나자 시침은 2시를 가리켰다. 조슈아는 연락을 받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고 버논은 유리장에 고개를 괸 채 밖을 바라 보았다. 날도 추운데 체육복만 입고 뛰어다니는 사내가 보인다. 저 때도 다 한 때지. 축구화를 신고 뛰는 남자를 보며 씁쓸함을 삼키다, 가게 앞에 선 커다란 트럭을 보고 이내 정신을 차렸다. 푸른 모자에 조끼를 걸친 사내 둘이 차에서 내린다. PDA를 만지작거리더니 가게명을 확인하고는 짐 칸의 자물쇠를 풀고 있었다. 딱 맞춰 왔네? 신분증을 건네자 두 사내는 조슈아의 이름을 물었다. 가게 동업자고 대신 받으려고요. 버논의 얼굴을 알고 있던 사내는 PDA를 내밀었다. 옛날처럼 서면 사인을 받는 대신 딱딱한 플라스틱 펜으로 일직선만 죽 그어주면 됐다.
남자는 기계를 건네 받고는 바로 짐 칸을 연다. 그래봐야 휴대폰 박스 몇 개 일텐데, 한참을 실랑이 하는 것이 버논은 의아했다. 무거우면 도와드릴까요? 젠틀맨의 기질을 발휘해 다가갔으나 사내 둘은 비키라고 소리를 친다. 도와준데도 싫다는 거절에 버논은 잠시 기분이 나빴으나, 말 그대로 잠시였다. 사내 둘이 낑낑거리며 옮기는 박스를 조우하고는 눈과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대체 무얼 시켰는지 몰라도 180의 버논만한 박스 하나가 가게 안으로 툭 던져졌다. 버논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게 뭐야? 조슈아는 대체 뭘 시킨 거야? 놀란 얼굴로 사내들에게 이것이 무엇인고 물었으나, 그들은 땀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치는 셀프라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트럭에 올라타 떠나버린다.
버논은 시계를 보았다. 조슈아가 나간지 20분이 조금 지났으나 그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좀 있으면 켈리 부부가 올텐데 이걸 그대로 둬도 되나? 버논은 혼자 박스를 옮기려 시도하다 이내 포기한다. 애인과 함께 쓰는 허리를 쉬이 다치게 할 순 없었다. 끈으로 묶어도 보고 밑에 천을 덧대보기도 했으나 꿈쩍을 않는다. 버논은 한숨을 쉬고는, 핸드폰 박스를 열던 커터칼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통째로가 안 된다면 부품 부품이라도 옮기는 편이 빨랐다.
#3
버논은 선천적으로 개 알러지가 있다.
알러지는 개에게 한정되지만 응급실을 갔던 기억 탓에 고양이도, 토끼도 싫어한다. 다리에 털이 달리면 다 기피한다. 싫어할 필요까지 있냐며 의아해하는 시선도 많았지만 버논은 아니었다. 보면 거북한 수준을 넘어 질색하기까지 하고, 도보에서 개를 만나면 아예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만큼 알러지가 심하고 개도 싫었다. 공원에 산책이라도 가면 하루 종일 재채기가 멈추지 않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고양이를 입양하려던 조슈아는 버논의 이야기를 듣고 잠정 보류를 선언했다. 어릴 때부터 장모종을 키우는 게 꿈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친우의 변사체를 치우고픈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언젠가 동업을 그만두면 그 때 키우지 뭐. 슈아는 아쉬운 내색조차 않았으나 버논은 그런 모습에 더 가책을 느꼈다. 자신 때문에 유능 회계사의 인생이 두 번이나 꺾여버렸다고 생각했다. 슈아의 코트에 한 오라기의 털도 허용할 생각이 없었으나 미안함은 별개의 문제였다.
굴러다니는 그를 두고 조슈아는 새로운 타개책을 강구했다. 친구가 위독하다니 배려하긴 했어도 섭섭한 것은 사실이니까. 밤낮으로 아마존을 뒤져 중견 사이즈의 안드로이드를 찾아냈을 때, 버논은 자신으로 인해 친구가 우울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했다. 슈아는 기함했다. 얼토당토 않은 추측은 삼가하라는 조언이었다. 버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결제 내역을 살펴보았다. 폰 수십 개를 팔아야 겨우 벌까말까 한 가격에 심지어 충전기는 추가금이 붙는다. 굳이 이런 걸 사겠다고? 버논은 저녁 영화 정도는 봐줄 수 있다며 슈아에게 제의했으나 기어코 욕을 먹었다. 외롭기야 하다만 사회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예민한 감수성 정도일 뿐 우울증이 있진 않았다. 슈아는 한도가 높은 신용카드를 꺼내든다. 결제버튼을 누르고 주소를 입력했다. 일시불로 결제하는 그의 재력에 감탄하던 버논은 조용히 세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버논으로 인해 조슈아는 인생에서 3번이나 우회를 선택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딱히 언질이 없으니, 슈아가 이미 강아지 안드로이드를 받아서 잘 살고 있겠거니 했다. 버논은 슈아가 콧노래를 부르며 결제하던 10월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눈 앞에 놓인 택배의 결제 일자를 확인하고, 이 거대한 박스가 고작해봐야 6kg 남짓해야 할 중형견 안드로이드임을 깨달았다. 그의 물건인데 함부로 열어도 괜찮을까. 그러나 캘리 부부가 오기까지 채 20분이 남지 않았고 좁다란 가게엔 버논만치 큰 박스를 눕게 해줄만큼 공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버논은 주저하다 칼을 든다. 드르륵, 무뎌진 날을 꺼내 칭칭 둘러진 테이프를 하나 둘 뜯어냈다.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가책과 캘리 부부가 왔을 때 의자는 어디다 두냐며 짜증낼 30분 후의 미래를 비교해봤을 때, 전자는 용인될 변명이 있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부여했다. 합리화 하고 나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전화를 받는다는 게 길어졌다. 슈아는 오랜만에 들은 동기의 목소리가 퍽 반갑다. 업무 중 아니냐며 리틀 조슈아가 타박했지만 버논도 애인 전화 받겠다고 수시로 자리를 비웠다. 버논이 10번이라면 슈아는 그 중 1번이었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슈아는 바쁘지 않냐는 친구의 말에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다. 시간 나면 얼굴 좀 보자는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얼굴도 붉힌다. 나야 좋지. 케이시 너만 좋다면. 버논에겐 들려준 적 없는 중저음으로 달달하게 답하자 그녀는 또 꺄르르 웃는다. 이번 주말이 괜찮다며 영화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권한다. 조슈아는 캘린더를 잽싸게 열며 데이트 옆에 작은 하트를 붙였다. 버논은 먼지 풀풀 날리는 박스를 열며 조슈아를 욕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조만간 썸을 타게 될 상대방과 안부를 나누느라, 그 흔하다는 코 가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조슈아다웠다.
#4
스마트 시대는 기본적으로 친절한 척 하지만, 까고 보면 불친절하다. 애초에 젊은 사람이 아니면 리더기를 쉽게 다루지 못하고 씨알만한 크기로 알파벳을 다닥다닥 붙여놓으니 돋보기로 봐도 침침한 노인들에겐 백 날 스마트폰을 설명해봐야 매출 올리기 그르튼 분야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대비해 왠만한 회사에서는 종이로 된 설명서를 동봉해준다. 글씨가 쥐씨알만 한 거야 차이가 없지만, 적어도 스크롤 때문에 글자가 흔들리진 않으니 나름의 타협안을 찾은 것이다. 홈페이지 한 켠에 설치 방법과 보증서에 대한 설명을 PDF와 문서 파일로 가지런히 정리해 둔 21세기지만, 그를 확인할 수 없는 노인들과 빈층민에 대비해 종이로 된 설명서를 박스의 맨 위나 바닥에 꼭 우겨넣어둔다. 버논은 이가 아날로그를 잊지 않기 위한 기성 세대들의 변덕 쯤으로 여겼고 조슈아는 그의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인 1차원적인 생각을 무례하다며 타박했다. 그는, 그가 영원히 늙지 않을 영혼의 뉴욕 워커 쯤으로 생각한다.
"씨발, 뭐 어쩌라는 건데."
박스를 열자 보이는 까만 가방을 버논은 오분 째 뒤적인다. 먼지와 끈끈한 테이프로 주변이 엉망이었지만 버논은 눈 앞에 놓인 안드로이드를 해치우는 게 더 급선무였다. 분명 그 날의 조슈아는 커다랗게 쓰여진 신형견 안드로이드를 결제했다. 결제 도중 오류가 났다거나 변덕을 부려 뒤로 가기 페이지를 누르지 않았다. 버논은 그의 옆에 앉아 결제 비밀번호를 제외한 모든 수순을 지켜봤고 강아지에게 무슨 이름을 붙여주면 좋을지 고민하는 조슈아를 비웃기도 했다. 결과값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변수는 없었다는 애기다. 그러나 박스를 치우고 굳게 닫힌 지퍼를 열었을 때 버논은 저도 모르게 날 선 비명을 질렀다. 지금은 CCTV로 사람을 잡을 수 있는 21세기, CSI가 애들 드라마가 아닌 과학 문명의 21세기. 분명 택배 범죄가 더는 기승 부릴 수 없는 4차 산업의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시신이 배달됐다. 버논은 자신이 어떤 거대 조직의 마약 운반 범죄에 연루된 것은 아닐까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조슈아에게 연락할까 했으나 누군가 자신의 휴대폰을 도청할 지 모른다는 과대망상에 빠진다.
버논은 동그란 얼굴을 내려다 본다. 길 지나가는 사람들과 다르게 코가 낮고 눈에 쌍꺼풀이 옅다. 머리는 갈색인데 얼굴은 하얀, 보기 드문 동양인이었다. 인종차별은 아니고 실제로 버논의 동네엔 동양인이 적다. 그가 아시안을 미워할 린 만무하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인인걸! 버논은 잠시 얼어붙어 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혹여 가게 안을 훔쳐보는 사람이 있진 않은지 밖을 주시한다. 아, 좀 있다 캘리 부부가 오기로 했는데. 버논은 급한 마음에 문을 잠그고 셔터를 내렸다. 지금은 폰 하나 파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 이 사태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가는 버논은 변명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철창에 갇혀버리고 말 터였다. 누가 본 건 아니겠지? 만약 아까 택배 기사들이 신고했다면? 조슈아가 지금의 그를 본다면 현대인이 낳은 과대 망상증의 폐해라며 실컷 놀려주었을 것이다. 만약 제 신상을 조사하다가 탈세까지 걸린다면, 윽! 버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버논은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을 쿡, 누른다.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 어쩌나 손을 덜덜 떨며 생사를 확인한다. 보통은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호흡을 확인해볼 텐데 버논은 늘 이상한 데서 과녁을 잘못 맞췄다. 그는 손가락을 반대손으로 부여잡고 용기를 내 피부에 붙였다. 끄악! 일단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뗐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의 볼은 말랑했다. 따듯하고 부드러워서 꼭 갓 완성한 식빵 같았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시 붙은 버논은 이내 사내가 죽은 시체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그럼 더 문제 아냐?!
박스 수신인을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회사가 아니라 연구소, 조슈아라면 분명 알고 있을 수신인의 정보를 버논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되뇌인다. 연구소에서 이런 걸 대체 왜? 버논은 앞에 놓인 물체가 슈아가 주문했던 안드로이드임을 인정하기까지 한참을 고민하고 허비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누군가가 자신을 반응을 염탐하고 있으며 실시간으로 자신의 보스에게 마약을 빼돌리지 않도록 지켜보겠다는,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버논은 식은땀을 닦고 허리를 숙인다. 만약 이것이 정말 범죄와 연관된 무언가라면 빨리 경찰에 신고하는 편이 좋았다.
그가 자신의 휴대폰을 찾아 손을 뻗는다. 더러운 먼지와 박스 조각들을 일일이 치워내며 까만 스크린을 찾았다. 그러나 포장을 풀던 중 잃어버렸던지 잡히지 않는다. 박스를 밀쳐도 보고 가방 안에 떨어진 건 아닐까 눈으로 뒤적여도 봤으나, 그의 신상 A사 폰이 발 달려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버논은 침착하게 하이, 시리를 외친다. 이럴 줄 알고 음성 인식 프로그램을 날마다 업그레이드 해 두었으며 버논이 멀리서도 들을 수 있게끔 볼륨 설정을 최대로 해두었다. 그는 익숙하게 핸드폰을 부르고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린다. 소리가 들리는 곳에 폰이 있겠거니, 오히려 신고 이후를 고민한다.
그러나 버논이 던진 인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답이 들렸다. 하이 시리 하면 돌아와야 할 네 주인님. 버논은 익숙한 기계 여성의 목소리를 기다렸으나 낯선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시리의 답을 대신한다.
음성 등록 완료.
시리처럼 어절이 딱딱 끊기거나 고조가 없지 않다. 부드럽게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웅웅거리는 기계 소리가 가게를 채운다. 앳된 소년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의심할만큼의 자연스러움. 버논은 벙찐 얼굴로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본다. 시체처럼 얼굴이 하얗던 동양인에게서 냉장고 기계음처럼 윙윙거리는 소리가 난다. 뭐야, 지금? 버논은 소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아까처럼 볼을 찔러볼까 하다 조심스레,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갖다댄다. 일정한 호흡이 내뱉어지는 가슴. 버논이 놀라 손을 빼려는데, 소년의 하얀 손가락이 버논의 끝마디를 붙잡는다. 그리고 쌍꺼풀이 옅은 눈을 떠 버논을 바라보았다. 이 동네에선 흔히 볼 수 없는, 까맣고 짙은 눈동자다.
"구동률 48%.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세요."
#5
부부는 슈아에게 문자를 남겼다. 예약한 시간에 왔더니 왜 가게가 닫혀있냐는 내용이었다. 슈아는 자신의 휴대폰이 열이 잔뜩 받았음을 깨달았다. 짧게 끝낸다는 게 이 대화 저 대화를 주고 받다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슈아는 전화를 걸어 부부에게 물었다. 가게 닫혀 있다고요? 버논이 있었을 텐데요. 그러나 부인은 약간 성이 난 목소리로 아무도 없었다고 했고 기다리다 지쳐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답한다. 슈아는 당황스러웠다. 버논이 농땡이를 잘 부리긴 해도 가게 문까지 닫고 놀러나갈 뺀질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슈아는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다음 번에 가게를 방문하면 5% 추가 할인을 드리겠다 답한다. 부인은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며 전화를 끊었으나 슈아는 그에게 사과할 '다음'이 주어지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코트를 여미고 부리나케 가게로 달린다.
"야, 너 지금 어디야?!"
당황한 나머지 한국어가 튀어나간다. 슈아는 그래도 예의를 갖춰 헬로우나 하이부터 던지는 편인데, 버논의 신호음이 끊기자 마자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런 식으로 짜증을 내는 건 슈아에게도 버논에게도 간만의 일이다. 버논은 슈아의 성화에 어, 음, 그게, 있잖아를 반복한다.
"너 캘리 부부한테 물건 주는 거 아니었어? 가게 닫고 지금 어디 간거야?"
"어, 그게 말로 하자면 좀 복잡한데."
"지랄한다. 똑바로 대답 안 해?!"
"내가 지금 일이 생겨서 잠깐 집에 왔어.."
"뭐?! 왜 갑자기 집에 가. 가게는 어쩌고?"
"오늘만 잠깐 부탁할게. 슈아, 오늘만."
버논이 버벅거린다. 뭔가 숨기는 듯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사정 설명도 않고 전화를 끊으려 한다. 슈아는 화가 났으나 버논의 이러한 태도가 처음인지라 당황스러움을 먼저 표했다. 갈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하던가. 손님한테 전화 오게하면 어떡해. 호통 어린 타이름에도 아랑곳 않던 그는 슈아가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자신이 내일 종일 가게를 볼 테니 그녀와 데이트를 가란다. 어이가 없었다. 하다못해 지금 무슨 일이 생긴건지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자꾸 괜찮다고, 미안하다고만 하며 시간을 끈다.
슈아는 그의 황소같은 고집을 잘 알아 이내 허탈한 목소리로 답한다. 그래, 알았으니까 내일은 제대로 나와. 오늘 내가 가게 마무리할테니까 쉬고. 어디 아픈 거면 꼭 전화 해. 고맙다는 인사를 3번은 더 들은 후에야 전화가 끊겼다. 슈아는 떨떠름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버논을 더이상 추궁할 수도 없었다. 찝찝한 마음을 가다듬고 셔터를 다시 올린다. 제대로 마무리도 하지 않고 불을 다 키고 떠났다. 슈아는 문을 열고 다시 유리장 앞에 앉아 장부를 확인한다. 아까까지 바닥을 굴러다니던 박스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6
주차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버논은 운전대에 몸을 기댔다. 놀란 마음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다. 눈을 부릅 뜨고 자신을 바라보던 소년은 다시 눈을 감고 시트에 기대 있었다. 다시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가려다 관둔다. 깨어있는 걸 다 알면서, 죽은 사람처럼 숨을 확인하는 행위가 그에게도 좋을 리 없다. 버논이 운전대를 톡톡 두들기자 소년은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아까까지만 해도 낯빛이 창백했는데 지금은 좀 생기가 돈다. 버논이 안전벨트를 풀자 소년은 따라 빨간 버튼을 누른다. 끈이 드르륵 말려 올라가고, 차문을 여는 행위까지 그대로 따라한다. 버논을 흉내내는 행위에 어색함이 없었다. 버논은 소년이 내릴 때까지 잠시 기다리다가 그가 사는 아파트로 향한다. 파이프는 다 녹슬고 벽마다 음란한 포스터가 나부끼는 촌스런 동네지만 버논은 딱히 부끄럽지 않았다. 소년도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209호 문을 열었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소년은 흥미로운 얼굴로 주변을 감상한다. 철문이 끼기긱 긁히는 소리, 문이 열리는 틈새로 몰래 들어온 낙엽과 벌레 한 마리. 소년은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23세, 버논이 거주하고 있는 7번지 건물을 메모리칩에 담았다. 차를 타고 오며 그의 직장과 거주지가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버논이 자켓을 벗고 히터를 켰다. 소년은 신발을 신지 않아 발이 더러웠다. 사람들은 자신의 거주구가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입력된 데이터 중 하나가 소년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래서 소년은 버논이 포트에 물을 담는 동안에도 현관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의 발은 지금 외부에서 묻혀온 바이러스와 먼지들로 인해 더러운 상태였다.
"뭐해? 안 들어오고?"
"제 발은 지금 더러워요."
"아, 옆에 문 열면 샤워실이야. 가서 씻어."
"전신을요, 아니면 파츠만?"
소년의 말에 버논은 헛기침을 한다. 파츠라니. 사람은 보통 자신의 신체 일부를 가리키는데 '파트'라는 개념을 적용하지 않는다. 손이면 손이고 발이면 발이지 무슨 뚝 떼었다가 갈아끼고 하는 조립 부품처럼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버논이 당황하여 컥컥거리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안면근육과 눈썹의 움직임이 당황과 놀라움의 감정을 알려준다. 소년은 그가 왜 당황했는지 묻고 싶었다. 자신의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색한지 체크를 해야, 다음 대화 때 더 인간다운 커넥션이 가능했다. 소년은 발을 씻기 전에 물었다. 왜 놀라요? 그러자 버논은 아예 물컵을 내려놓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도 없는 거 같은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의 끝을 높여 묻는다. 꼭, 자신에게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태도였다. 버논은 목을 큼큼 가다듬고 답한다. 아니, 안 놀랐어. 씻고 싶으면 씻어. 버논의 말이 거짓임을 알지만 소년은 왜 거짓말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저장된 데이터 한 줄이면 버논의 상태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소년은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냉수 가장 끝쪽에 온도가 맞춰져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손과 발을 씻었다.
그는 거짓말을 할 줄 안다. 소년은 또 한 줄의 정보를 저장했다.
#7
소년이 물을 뚝뚝 흘리며 나오자 버논은 잘 마른 수건을 가져다 주었다. 소년은 탁한 분홍색의 수건을 바라보다 손과 발을 닦았다. 본인은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방수 스킨이 설계된 기계임을 전했다. 버논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거실에 물이 떨어지면 안 된다고 답했다. 소년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일반적인 집과 다르게 그는 집 안에서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슬리퍼를 사올까요? 소년의 말에 버논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우리 집은 신발 안 신어. 소년은 인간의 맨 발은 자극에 취약하다고 설명한다. 뒷꿈치가 닳아 굳은 살이 박히거나 거주지 내의 물건에 찔려 상흔을 입을 수 있다 말한다. 그러자 버논은 웃으며 또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엔 못 같은 거 안 굴러다녀. 소년은 깨끗하게 청소된 바닥을 보고 자신의 발바닥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압정이나 전선 같은 것이 없다.
"뭐 좀 먹을래? 배 안 고파?"
"저는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요."
"못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기능은 있지만 쓰지 않아요. 내부 장치가 고장날 수도 있어요."
그건 좀 안 좋네. 버논이 물을 호록 삼킨다. 냉장고에서 토마토 소스와 양파 따위를 꺼내더니 도마 위에서 종종 썬다. 소년은 버논이 하는 행위를 물끄러미 지켜본다. 그의 행위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녹화한 후, 영상을 문서로 변환해 오너의 데이터로 분류한다. 그의 음성을 인식해 주인으로 등록한 순간부터 소년은 버논의 습관과 취향, 직장, 버릇 등을 놓치지 않고 전부 변환하여 저장하고 있었다. 그는 소년의 이러한 움직임을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지만 소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본인은 소유주의 편의를 위한 안드로이드. 인간이 기계를 향한 불쾌한 감정을 느낄 수 없도록 행동과 감정, 송출할 반응까지 전부 계산하여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대개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감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 좀 많이 했어."
"..."
"젓가락 쓸 줄 몰라? 포크 줄까?"
"아뇨. 상관 없어요. 20초만 기다려 주세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테이블에 중앙에 올려둔다. 깔판을 올려달라 하기도 전에 소년이 미리 준비해두었다. 버논은 냉장고의 음료를 꺼내 컵에 따른다. 본인은 괜찮다고 하지만 손님에게 밥 한 끼조차 먹이지 않는 것은 한국인의 도리에 어긋났다. 투명한 글라스에 오렌지 주스를 본인의 것에는 맥주를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 소년은 무얼 하는지 잠시 허공을 보다가, 이내 버논이 건네준 젓가락을 집어 올렸다. 검지와 중지에 이리저리 껴보더니 능숙하게 손을 움직인다. 버논은 소년이 젓가락을 사용할 줄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많으면 남겨. 억지로 다 먹지 마."
버논이 그릇 가득 음식을 담아서 건넨다. 소년은 음식을 남겨도 된다는 버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처분하는 연간 비용은 평균 5495만 달러로, 온난화를 가속화하는 요인 중 하나로 국제환경기구에서 발표했습니다. 소년이 줄줄 읊자 버논은 마시던 맥주를 뿜었다. 바닥에 다 튀고 옷 앞섶을 다 적셨다. 인간은 당황하면 곧잘 음료를 뱉는다. 소년이 그렇게 저장하는 사이 버논은 키친타올을 대충 뜯고 맥주를 닦았다. 젓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소년에게서 순진한 얼굴이 읽힌다. 버논은 어이가 없어 소년에게 물었다. 너 그런 거 어디서 배웠어? 그러자 소년은 빠릿하게 답했다. 검색하면 나와요. 전 슈퍼 컴퓨터만치 빠르니까요. 어쩐지 자신감이 가득한 말투 같아 버논은 기가 찼다. 아무리 그래도 먹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해? 버논은 부끄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래도 배부르면 남겨. 내가 다 먹을게. 버논이 앞접시를 내밀자 소년은 젓가락을 만지작 거리다 스파게티에 푹 꽂는다. 배움과 실행력은 별개라고 소년은 아직 젓가락질이 미숙한 듯 했다. 버논은 포크를 건네줄까 하다 스스로 하게끔 내버려뒀다. 대신 조용히 젓가락질 하는 걸 보여주자 소년이 스파게티 휘적질 하던 것을 멈추고 버논을 관찰한다. 손끝과 손끝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고, 금새 따라한다. 버논은 소년이 한 입 한 입 음식 삼키는 것을 전부 지켜보았다.
"그래서 너는."
"네."
"대체 정체가 뭐야?"
"WZ사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따라 2012년부터 제작되었습니다. 가정 지원용 안드로이드 베타 버전 SPU-218#0, 코드 번호는 소유주의 사회등록번호 4자리로 귀속됩니다."
"안드로이드? 그런 게 있어?"
"닥터 베넷의 지시 하에 개체들이 제작 중에 있습니다. 상용화 되기 전 아마존 마켓과 함께 베타 테스터를 모집했습니다."
"어 그럼.. 너 같은 애들이 더 있다는 거야?"
"1세대 SPU는 현재 18개체가 운용 중입니다."
버논이 묻는 말에 소년은 성실하게 대답한다. 못 알아듣는 낌새가 보이면 표정을 읽고 추가 설명을 덧붙인다. 버논이 왼쪽 눈썹을 꿈틀, 오른쪽 눈썹을 꿈틀하면 소년은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을 읽고 산출된 정보와 감정을 매치시켰다. 그는 이러한 말을 했을 때 이러한 반응을 한다. 버논과 대화가 계속될 수록 소년은 버논이 더 알아듣기 쉬운 쪽으로 조리있게 설명했다. 버논은 스파게티를 씹으면서도 자신 앞에 앉은 대상이 슈아의 똘똘한 친구들이 아니라 그가 주문한 중(견)형 안드로이드란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웃어보이는 게 깡통 기계라고? 버논이 자신도 모르게 소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소년은 묻지 않고 그를 기다려주었다. 그에게서 흠을 찾아내려는 주인의 모습을 몰아 붙이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인간은 원래 의심이 많다. 그는 저장된 데이터가 버논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명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사람들은 널 뭐라고 해? 안드로이드? 기계?"
"연구원들은 안드로이드에게 설정된 고유 번호로 호명합니다. 외부 사람들의 반응은 잘 모르겠네요. 출시된 게 처음이라."
"널 만난 사람이 내가 처음이란 거야?"
"가정에 보급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코드가 불안하시면 고유 번호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218 이렇게 불러.."
"이상하지 않습니다. 안드로이드에겐 고유 번호가 곧 이름이니까요."
씹고 있던 양송이가 목에 턱 걸리는 기분이었다. 아깐 물을 그렇게 뱉어대더니 이젠 먹던 스파게티마저 뱉어낼까, 소년은 버논의 신체반응이 어떤 식으로 판명날지 16개 정도의 가설을 머릿속에 띄웠다. 만약 기도에 음식물이 걸려 호흡이 불안정해지게 된다면 명치와 갈비를 끌어안고 하임리히법을 실시해야 했다. 소년이 버논을 응시하는 동안 버논은 켁켁 대며 음식물을 넘겼다. 아까 뿜어댄 것도 쪽팔린데 잘게 쪼개딘 양파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버논이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자 소년은 가정했던 시나리오 9개를 지웠다. 소유주가 숨을 쉬지 못한다는 가정을 지우니 소년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극히 적어졌다. 소년은 버논이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보통 사람들은 이름을 번호로 짓지 않아."
"전 안드로이드인걸요."
"그래도 사람이랑 살려고 여기 온 거잖아."
"테스트 기간에는 인간의 사회 작용을 관찰하여 데이터로 변환합니다. 축적된 정보는-"
"그래, 그래. 뭐가 됐든 사람이랑 살면서 살 부대낀다는 얘기 아니야."
"그렇죠."
약간 저속하네요. 소년이 가감없이 말하자 버논은 꺽꺽, 웃음을 흘렸다. 일반적인 감정 반응과 달리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소년은 그의 유머 감각에 예외 표시를 남겼다.
"그럼 너도 사람처럼 이름을 가져야지. 난 이름이 숫자인 사람이랑 살 수 없어."
"전 안드로이드에요."
"그래, 나랑 같이 살 사람같이 생긴 안드로이드지. 누가 아니래?"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정보를 수정 및 재등록할 수 없어요."
"그냥 너랑 내가 그렇게 부르면 되잖아. 내 친구 이름은 조슈아인데 난 가끔 조라고 불러. 법적으로 등록된 이름 아니지만, 뭐 어때."
"고유성을 해치잖아요.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세상엔 수많은 버논이 있고 수많은 조슈아가 있어. 그래도 우린 서로를 알아 보잖아."
버논이 남은 맥주를 들이킨다. 물기 어린 잔이 테이블에 닿자 물방울이 뚝 떨어진다. 소년은 버논의 감정이 즐거움과 재미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을 수집했다. 자신의 소유주는 안드로이드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소년은 버논이 어떤 부분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는지 감정의 원인을 탐색했다. 어디서부터 그의 감정이 상승곡선을 그렸는지 녹화해 둔 대화를 차근차근 되짚었다.
소년이 바쁘게 데이터를 뒤적이는 사이 버논은 젓가락으로 그릇을 탁탁치며 고민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그래도 외국인데 기깔나는 영어 이름 한 번 붙여줘야 되나. 자신도 모르게 젓가락으로 박자를 맞추자 소년은 소유주가 보내는 일종의 신호로 해석했다. 강약과 두드리는 간격을 기억해 부호로 변환하였다. 그러나 마땅한 해석이 도출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소년은 두드리는 행위가 소유주의 감정으로 인해 산출된 감정임을 깨달았다. 그는 기분이 좋으면 사물을 부딪혀 박자를 맞춘다. 버논은 작게 콧노래를 부르다 그릇을 세게 탁, 친다. 소년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버논은 사람 좋은 미소로 소년의 눈을 맞춘다. 소년은 버논의 눈동자가 자신보다 훨씬 옅은 갈색임을 확인한다.
"승관이 어때. 성 말고 이름만."
"당신의 이름 양식과 어긋나요.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을 구별해주세요."
"괜찮아. 어차피 너랑 나만 부를 거잖아."
"이름은 대상에게 할당되는 구분 명제에요."
"언젠 이름 짓기 싫다며."
버논의 말에 소년은 잠시 입을 다문다. 예상했던 대답이 오지 않아 반응이 늦다. 버논은 소년의 얼굴이 꼭 당황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허를 찔려서 할 말을 고심해야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적절한 답을 찾느라 바쁘다. 버논은 그런 소년의 반응이 즐거웠다. 근래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소년의 찌푸린 미간이 귀여웠다. 방수 스킨은 주름 안진다디? 미간 펴. 버논이 엄지로 꾹꾹 눌러 펴자 소년은 다시 표정을 고친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표정으로 설정했으나 버논의 눈에는 심통난 어린 아이 같았다. 소년이 당신과 같은 성을 달라고 하자 버논이 부러 놀란 척을 한다. 벌써 결혼까지?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데. 분홍빛 입술 밑으로 옅게 보조개가 파인다. 소년은 자신의 소유주에게 양쪽으로 보조개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소년이 뚱 해있자 버논은 흥미로운 카드를 꺼내든다. 안드로이드는 소유주의 정보를 전부 저장한다며, 그럼 내 과거 얘기도 좀 흥미로워 하려나? 버논이 말하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상황에 따라 설정된 감정 값으로 소년은 놀라움과 흥미를 선택했다. 소년의 반응에 버논은 베시시 웃음을 보인다. 소년의 앞에 있던 접시들을 치우며 자신이 그 이름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한국에 살았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이름이야. 이름은 승관이고 성은 김이었어. 엄청 잘 지냈던 친구라 지금도 종종 연락해. 버논이 말하자 소년은 모호한 얼굴을 한다. 인간은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움과 향수를 느낀다고 하는데 그렇다기엔 버논의 얼굴은 꽤 해맑았다.
소년이 입술을 우물거리자 버논은 볼을 살짝 움켜쥔다. 겁에 질려 손가락으로 콕콕 대던 것이 아니라 귀여운 사촌 동생을 보듯 부드럽게 감싸 쥔다. 소년은 볼에 닿는 온기를 느끼며 온도를 측정한다. 36.9도. 높은 신체 반응. 소년이 버논의 행동에서 수십 수백 가지의 반응을 산출하는 사이, 버논은 간단명료하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네가 승관이긴 해도 그 때의 승관이는 아니잖아. 넌 나랑 살게 될 안드로이드지. 버논의 말에 소년은 회로가 잠시 멈췄다. 과거의 사람에게서 찾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논의 감정은 그것들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 다 먹은 거지? 설거지 한다. 버논이 그의 앞에 놓여있던 그릇을 치운다. 후라이팬에 눌러붙은 소스들을 떼느라 수도꼭지를 트는 게 보였다. 소년은 흥얼거리는 버논을 향해 묻고 싶었다. 친구의 이름 붙여준다는 건, 내가 당신의 친구란 의미인가요? 승관은 자신의 소유주에 대해 한 줄의 정보를 추가하려 했으나 쉬이 저장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출력된 정보들이 너무 많아 신생 안드로이드의 머리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승관은 버논이,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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