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ic
[솔부] Atlantis 08 본문
08. Atlantis
Written by 콤타 (@comtar34)
“신전 안쪽에 이런 방이 하나 있어. 지금은 못 들어가고 어렸을 때 몇 번 가봤거든.” “...” “좀 작고 낡은 방인데 이런 책들이 엄청 많아. 방바닥에도 이만큼씩 쌓여 있어.” “...” “네 할아버지는 아마 아닐 거야. 내가 태어나기 수세기 전의 일이니까.” 남자는 책등을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와 비슷한 방이 아틀라스에도 있다면 누군가 과거에 그 곳을 방문했었다는 의미일까. 색이 바랜 종이와 읽기 힘들 정도로 헤져버린 낡은 책들. 과거를 더듬는 남자의 말들이 드문드문 제 머리 위로 그려졌다. 따듯한 기억이었을까, 시간을 거스른 그의 얼굴이 퍽 즐거워 보인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제 행동에 둥실거리던 먼지들이 다시 땅 위로 내려앉았다. 손가락 틈새로 금박이 벗겨진 책 표지가 보인다. 읽어버린 대륙. 저가 들고 있는 게 어떤 책인지 그는 알고 있을까.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이 작은 방에서 들려오는 건 오로지 남자의 목소리뿐이다. 저와 그가 태어나기 수세기도 전의 일. 시선 끝이 맞닿지 않은 채로 대화는 이어졌다. “남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아틀라스를 찾아왔어. 그 남자의 아버지뻘이 되는 사람도, 그 아버지가 되는 사람도 계속. 줄기차게 대륙 밖으로 쫓아내도 다음 해가 뜨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리를 보러왔지. 외지인을 경계하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해. 한동안 그렇게 실랑이가 이어지다가 결국 아버지는 그들 중 한사람을 대륙 안으로 들여보내 주기로 약속했어. 대신 남은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기로 하고. 그 날부터 딱 보름 동안, 남자는 대륙 곳곳을 들쑤시며 우리의 역사를 물어보고 다녔대. 잠도 자지 않고 그렇게 도시 밖을 나다니더니, 떠나기 며칠 전부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더라. 곁에 아무도 들이지 않고 수십 수백 장의 파피루스를 가져다 글을 쓴 거야. 그가 아틀라스에서 보고 느낀 그 모든 것들을 담아 두 권의 책을 만들었지. 하나는 살고 있던 방에 두고 하나는 대륙을 떠날 때 자신의 짐과 함께 가져가 버렸어.” “그래서 지금 우리가 당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구요?” “아마도. 그 이후의 일은 나도 잘 몰라. 다만 신화로나마 우리를 알고 있다기에 그렇게 생각해본 것뿐이야.” “그럼 당신도 그 책을 읽은 건가요?” “응.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내용이 꽤 재밌더라고. 나 때문에 다른 형제들도 한동안 신전에 출입 못 했었어.” “어렸을 때도 지금처럼 장난기 많았나 봐요?” 나 의외로 얌전했거든? 장난스런 질문을 남자는 여유 없이 맞받아친다. 꼭 그렇게 놀려야겠냐는 투정에 살짝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재밌는 걸 어떡해요. 반달처럼 접힌 눈웃음이 방 안의 남자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치켜 떠봤자 귀엽기만 하단 걸 당사자는 알기나 할까.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그 방에 못 들어가.” “...” “큰 형이 아예 까먹은 거 같더라. 나야 뭐 고맙지.” “...” “그래도 그 사람이 처음이었거든. 육지에서 바다로 와 준 사람.” “...” “그래서 난 그냥 그 사람을 선구자라고 불렀어.” “...” “선구자의 방이라고.” 살짝 머금은 미소엔 장난기보단 진중함이 어려 있다. 당신이 가고 싶어 하던 곳도 저 바다 밑이었나요? 돌아올 대답이 없다는 걸 알기에 가슴속으로나마 작은 질문을 던졌다. 낡은 어선으로 온 세상을 찾아내겠다던 그 엉터리 같던 꿈이, 사실은 진짜였다는 걸 알면 그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개를 돌리자 벽에 걸려 있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거짓말쟁이라고 놀리던 철없는 꼬맹이를 당신은 용서해 줄 수 있을까. 눈가를 스쳐가는 그리움에 시시한 소원을 담아 보냈다. 그래도 그대가 아니라 나였기에 이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거겠죠. 당신을 향한 미안함 만큼이나 인연에 대한 고마움이 앞섰다. “이 방은 네 방 아니지? 아까부터 엄청 우울해 보이네.” “제가요? 전 괜찮은데.” “엄청 힘없어 보여.” “할아버지 방이에요. 얼마 전에 돌아가셨고요.” 그 말에 눈물이 솟구친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남자의 눈엔 제가 어떻게 비춰질지 몰라도 혼자 비척거릴 만큼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았으니까. 물론 저 또한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때가 있었다. 어렸기에 몰랐고 겪어보지 않았기에 몰랐던 ‘죽음’의 개념. 그는 실로 빠르게 내 주변을 잠식해갔고 잠깐 한 눈을 판 새 턱 밑까지 저를 쫓아와 있었다. 사람이라면 한 번은 붙잡히게 되는 이름. 단지 그가 붙잡은 처음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던 당신이었을 뿐이다. 때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 긴 일생을 정리할 틈도 없이 제 곁을 떠나야 했다. 그렇다 해도 이미 잠 들어버린 당신을 제가 무슨 면목으로 찾아뵐 수 있을까. “지금은 어디 계시는데?” “바다에요. 화장하고 뿌려드렸어요, 앞바다에.” 가루가 되어 떠났다. 손 틈으로 흩날리던 고운 입자들은 하늘의 공기만큼 가벼웠고 당신의 인생만큼 무거웠다. 작은 나무틀 안에서 멈춰버린 시간. 늙은 육신을 잠재우기엔 턱없이 비좁았던 그 곳이 인생의 끝이고 마지막이었다. 한 번 쓰고 버려질 나무판자가 그대의 잠자리임을 알았더라면 저는 더 빨리 당신을 만나러 올 수 있었을까. 그리움으로 얼룩진 허무감. 눈물과 뒤섞여 굳어진 조각들은 너무도 빨리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럼 괜찮아. 바다는 다시 돌아오니까.”
“지금 저한테요?” “언제나, 누구한테든.” 지금이 정의되지 않는다. 이 작은 방 안에 갇혀있을 때면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크게 우울감과 후회였다. 더 빨리 오지 못했다는 자기 비난과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 마지막까지 미뤄두었던 낡은 문고리를 비트는 순간, 스스로를 향한 죄책감이 온 몸을 옥죄었다. 그게 당연했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은 당신을 차갑게 방치한 나였고 그걸 알면서도 짧은 길을 달려오지 못한 나였기 때문에. 잊지 않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는 것, 이것이 나의 속죄였고 나의 사죄였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았다. 그가 용서했을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꼴은 너무 큰 사치였고 교만이었다.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려던 내게 남자는 너무도 쉽게 다른 길을 내보였다. 마치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란 듯 제 앞에 놓인 불길을 치워버린다.
“그러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말라고.” 가장 듣고 싶었던 말, 가장 들을 수 없었던 말.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는 남자의 모습에 이루 못할 고마움을 느꼈다. 한동안 멍하니 남자의 뒤통수만 지켜보다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에 붙은 먼지를 탈탈 털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커다란 박스에 책을 담았다. 벌레가 파먹은 듯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한 종이들을 말없이 박스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당신에게 전하고픈 대답은 감사하다는 말 따위로 표현할 수 없다. 언어로 형용하기엔 너무 크고 거대했으며, 제 머리론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이 감정을 입으로 전할 수 없다면 적어도 보여줬으면 한다. 당신이 내게 어떤 변화를 남겨 주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게. 손끝에 닿는 부러진 연필들과 줄 떨어진 시계를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닳아빠진 슬리퍼와 오래 전에 붙어버린 미술용 지우개. 책장과 서랍을 비울수록 곰팡이 핀 벽지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옅은 채취에서 느껴지던 당신의 흔적. 이제는 찾을 수도 없는 발자취를 돌이켜보며, 미련스럽게 끌어왔던 감정을 쓰레기들과 함께 토해내었다. * * “달떴네요.” “저게 달이라고? 별이 아니라?” “저렇게 큰 거는 달이에요. 옆에 있는 작은 것들이 별이고.” 작은 방마저 비워버리고 나자 해님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어두컴컴해진 창밖을 보며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가늠하는 사이, 남자는 입을 헤 벌린 채로 둥그렇게 뜬 달을 바라보거 있었다. 부엌에 불을 키자 9시를 살짝 넘긴 시계바늘이 보인다. 벌써 이렇게 됐나 혀를 차고는 저녁은 뭘로 때워야 할지 가벼운 고민에 빠졌다. 오늘 실컷 부려먹었으니 좀 좋은 걸 먹여야 할 것 같은데. 뭐 먹고 싶은 게 있냐는 제 질문에도 남자는 창밖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달은 어제도 있었고 그제도 있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마냥 그러지 마요. 저렇게 동그란 건 오늘이 처음이라며 제 무심한 말에 강력한 반기를 든다. “달 처음 봐요?”
“당연하지. 바다 밑에서 저 조그만 게 보이겠냐.” “실컷 봐둬요. 오늘 지나면 다시 홀쭉해지니까.” 안 그래도 그럴 거였어. 테라스 쪽에서 꿍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말만 특별한 존재지 제 시선에선 평범한 사람보다 더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 밑에 갇혀 맨 날 제사 지내지 가족끼리 서열 싸움 하지.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얘기를 남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당연하다는 듯 줄줄 읊어댄다. 게다가 말을 들어봐도 딱히 오래 사는 메리트라던가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던데. 왠지 모를 동정심이 느껴져 냉장고 구석에 아껴두었던 고기 팩을 뜯었다. 돌아가면 고생 꽤나 할 텐데 여기서라도 잘 먹어야지. 아무 생각 없이 재료를 손질하다 번뜩 스쳐가는 생각에 칼질을 멈췄다. 돌아간다. 남자가 돌아간다. 바다로 돌아간다. 우리가 정말 원초적인 것들로 하루 이틀 밤을 보내는 사이 남자가 돌아가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심지어 어떻게 왔는지 방법조차 모르는 상태의 남잔데, 너무 무방비하게 시간을 보냈던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손길을 살짝 늦췄다. 조금은 어정쩡한 기분. 처음 남자를 집에 들였던 것도 그가 빨리 돌아가겠다는 약속에서 시작된 거였는데, 어째서인지 보내야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유 모를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섭섭하기도 하고 조금 더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물론 집이 정리되면 저도 이곳을 떠나야겠지만 그 때가 지금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인다. 습관이 되어버린 걸까. 겁이 날 정도로 익숙해진 남자의 모습이 한 순간 사라져버린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무심한 말투와 달리 보조개가 깊게 파이는 해맑은 미소. 위험하게 아름다운 그 모습이 너무 빨리 떠나가지 않았으면 한다. 가까워질수록 깊어지는 이 느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우정? 친숙함? “별자리는 안 보이네. 엄청 기대하고 있었는데.” “도시라 잘 안 보일 거예요. 좀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되는데?” “아니, 여기서 얼마나 더 높아야 되는데.” 입은 툴툴거리면서도 창문을 닫는 손길은 조심스럽다.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한 층 높아진 목소리로 남자의 말에 답했다. 누가 머릿속을 보고 있는 것 마냥 혼자 찔리고 혼자 흠칫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영문을 모르는 남자는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저를 향해 곧장 걸어온다. 별이 보고 싶어요? 사소한 질문이 목구멍에서 탁 걸린다. 뭐든 궁금해 하는 당신이기에 어떤 대답을 할지 눈 감고도 맞출 수 있다. 다만, 얼마만큼의 추억이 쌓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정체 모를 미련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제게서 등 돌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 조금 더 같이 있어도 괜찮을 거라는 마음. 이 감정이 당연시 될수록 멀어져가는 당신의 발목을 떠올리기 싫어진다. 보내는 것도 겁이 나고 붙잡는 것도 겁이 난다. “여기 어떻게 왔는지 기억해요?” 말을 바꿨다. 밖으로 튀어나갈 본심을 누르자 이번엔 다른 의미로 입을 나불거렸다. 어, 그러니까 불편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요. 던져놓고 눈치를 보는 제 모습에 오히려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남자는 앞에 놓인 샐러드를 포크로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새의 부리처럼 작고 오므라지는 귀여운 입술. 말을 걸어놓고선 그 대답에 쉬이 집중하지 못했다. 저가 언제부터 이렇게 인내심이 없었던 걸까. 머릿속에서 내린 공식과 정답은 주인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조각조각 귓가를 파고드는 단어들을 차분히 붙잡아 곁으로 끌어당긴다. - 전 명절연휴가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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