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logic
[솔부] Atlantis 10 본문
10. Atlantis
Written by 콤타 (@comtar34)
우중충한 하늘은 며칠을 굶주린 짐승마냥 줄기차게 으르렁 거렸다. 딱히 빗방울이 내리치거나 하진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지나가던 이들의 발걸음을 주춤하게 만든다. 날이 밝다면 밖이라도 나가려 했던 저의 계획은 시작도 못한 채 접어야 했다.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함께 길이라도 거닐자던 작은 바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시하게 오그라들었다. 어두워. 멍하니 바라만 보던 것이 꽤 길어졌는지 창문엔 어느새 제 왼쪽 손바닥이 하얗게 눌려있다. 뒤를 돌자, 아까부터 소파에만 기대있던 남자의 뒷모습이 한 없이 무력하고 한편으론 모든 게 귀찮은 듯 보인다. 바닥을 가르는 무거운 분위기는 구름 위가 아닌 거실 바닥에 내려앉은 걸까. 살짝 말을 붙여보려 해도 손가락만 움직이는 영혼 없는 행동에 어떤 구실을 갖다 대야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어디 아파요?”
절레절레. 배가 고프냐는 말에도 말없이 고개만 좌우로 움직인다. 어디 불편한가, 아픈가 싶어 한참을 성가시게 굴어도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 지레 겁을 먹게 되었다. 엄마에게 잘못을 들킬 것 마냥 저가 뭘 잘못했는지 곰곰이 되짚어 봐도 남자를 불편하게 할 행동은 딱히 없었다. 소파 끝에 살며시 엉덩이를 걸치곤 끝이 없는 눈치싸움을 시작한다. 가시를 깔고 앉은 듯 말 못할 불편함. 상대방을 달래는데 완전 숙맥인 저로써는 이렇게 답 없는 스무고개는 쥐약이나 다름없다. 뭔가 대화를 이어볼만한 주제를 던져보려 해도 머리 위를 떠다니는 건 괜찮냐는 질문 하나 뿐이다. 말주변이 없는 것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 와서 어리숙한 모습이나 내보이는 멍청한 가슴을 탓해야 할까. 어젯밤부터 급격히 다운된 남자의 기분은 꺼진 불씨처럼 쉬이 타오르지 않았다.
그냥 가만 놔두는 게 좋은 걸까. 오버하는 것처럼 안절부절 하는 저의 행동이 오히려 남자의 심기를 건든 것 같아 괜한 껄끄러움이 일었다. 무얼 하든 일단 그에게서 관심을 끄는 것이 저에게도 남자에게도 모두 이득인 것 같아, 한숨조차 내쉬지 않는 작은 등을 뒤로 한 채 거실 천장에 달린 화려한 조명 따위를 구경했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각진 조각들. 제 역할을 잃은 샹들리에는 미려한 짐짝만큼이나 쓸모없고 불편하게 다가왔다. 화려하게 둘러진 금테는 소파만 남은 초라한 거실과 어울리지 않아 혼자 붕 뜬 것처럼 느껴진다. 알게 뭐야. 어차피 새 입주자가 오면 버려질지 남겨질지 알 수도 없는데. 무얼 하든 알게 뭐 있냐는 대답으로 회귀되는 바람에 신경을 끄자는 다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세를 고쳐 앉다가 정전기가 인 머리를 다시 정돈하다가. 한참이나 두 루트를 반복했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머리칼 헤집던 손을 곱게 내려두었다.
“나한테 화난 건 아니죠?”
뭐 마려운 사람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것도 결국 제가 뭘 잘못했나 하는 어리석은 죄책감 때문에. 혼자 곱씹는 질문은 훌륭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고민만하다 슬쩍 던져보는 질문엔 사실 간절함 반 진심 반이 담겨져 있었다. 저 때문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귀를 잔뜩 세워두었지만 그마저도 돌아오는 목소리가 없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뭘 해야 말 해줄 건데요. 시시한 투정을 부려 봐도 또렷한 눈빛으로 입을 여는 건 남자가 아니라 저일 뿐이다. 계속되는 남자와의 줄다리기에 지쳐, 이젠 문장이 아니어도 좋으니 언어 비슷한 그 무언가만 들려와도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하룻밤 사이 말 하는 법을 까먹은 것처럼 눈짓 손짓으로 모든 의사소통을 해결하는 남자의 모습에, 답답함이 이젠 가슴을 넘어 목 끝까지 차오른다.
그냥. 웅얼거리던 남자의 입은 짤막한 단어 하나를 뱉어냈다. 귀에 잘 들리지도 않을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선 아무것도 아니란 듯 어색한 미소를 슬쩍 내비친다. 목소리 한줄기에 신이 나 고개를 번쩍 들자 약간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와 같은 무기력한 모습으로 다시 소파에 고개를 파묻는다. 혹여 남자가 불편할까 조용히 꼼지락거리던 양 손가락엔 물기가 살짝 일었다. 끈적이는 손바닥을 바지 위로 슥 닦아내고는 붙여두었던 엉덩이를 다시 일으켰다. 방에라도 들어가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두 발이 닿는 곳은 굳게 닫힌 작은 방이 아닌 옷들이 어지러이 쌓인 캐리어 앞이었다. 왜? 뭔지는 몰라도 저렇게 힘 빠진 뒷모습을 그대로 놔두고 싶진 않다. 괜히 나서면 안 될 것 같으면서도 저런 약해진 등은 보고 싶지 않다는 모순된 감정. 고개를 들자 창밖의 울먹이는 먹구름은 아침 그대로였다. 긴 한숨도 닿지 않을 멀어진 느낌이 싫어 가만히 바라만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온 느낌. 끝까지 말이 없는 남자의 태도를 딱히 뒤집을 순 없는 걸 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그건 남자의 결정이고 자신만이 내릴 수 있는 독자적인 의사표현이니까. 봄바람처럼 살랑이던 웃음이 가시자 남은 얼굴엔 고민과 갈등의 흔적이 드러났다. 두 팔 안에 가둬버린 망설임을 어떤 식으로든 뒤집을 수 없기에 직접 화폭에 뛰어드는 것만큼 좋은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겠다. 무작정 캐리어 안에 던져두었던 두꺼운 잠바를 꺼내 들었다. 짙은 갈색에 살짝 구겨진 옷의 끝자락. 상관없다는 듯 온 몸을 감싸 덮고는 남자의 몸에 맞을 작은 외투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뭐하는 거냐는 날카로운 시선이 제 왼쪽 얼굴을 콕콕 찔렀지만 꿋꿋이 그가 입을만한 티와 바지를 찾아 뒤적였다. 기분만을 따르는 충동적인 행동엔 딱히 왜라는 이유를 들먹일 수 없었다. 그저, 쫓아가기도 벅찬 고속도로 위를 무작정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우리 할아버지 보러 갈래요?”
* *
암석이 갈라질 듯 부딪혀오는 파도는 매섭기보단 몰아치는 것에 가까웠다. 바람이 거셀수록 높아지는 그 모습이 마치 우리를 잡아먹겠다는 듯 거칠게 다가온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풍경은 상상만큼 로맨틱하거나 운명적이진 않았다. 그냥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약간 더 예쁘고 고프지도 않은 배를 붙잡게 만들 상인들이 약간 더 있는 정도? 일몰을 보기엔 이르고 일출을 보기엔 너무도 늦어버린 어중간한 시간대에 모래사장에 덩그러니 남겨진 남자 두 명의 모습은 꽤나 웃기고 재밌는 그림이었다. 춥진 않을까. 입을 떼어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는 한 시간 전의 모습과 특별히 다를 바가 없다. 돌아가던 시계바늘이 멈춘 듯 끝내 맞닿지 않는 두 시선. 발밑으로 몰려오는 모래 알갱이들에 일일이 눈을 맞추며 제게 들려올 단 하나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라는 바람을 가슴에 안고서, 바닷물이 올라오는 가장자리를 피해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작은 손이 외투를 받아든 그 순간부터 대충 구겨 신은 운동화로 한 마디 대화도 없이 이곳까지 왔다. 하루 종일 걸어도 보이는 똑같은 그림을 풍경으로 삼으며 가벼운 발걸음을 놀렸다. 눈앞에 아른대는 장막을 거두자 흐릿하게 보이는 이 무한한 감정. 펼쳐지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만나게 될 모든 것이 기대되는 그런 미래. 정돈되지 않는 머릿속은 목적지를 잃은 발걸음처럼 제 멋대로 길을 만들고 새 목표를 세워갔다.
“어때?”
“뭐가요?”
“나랑 같이 있는 거. 싫지 않아?”
앞뒤로 나란히 찍히는 발자국은 짠 바닷물이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모습을 감췄다. 오랜 시간 닫혀 있던 목소리는 예상과 다르게 평소처럼 얇고 부드러우며 새가 지저귀듯 귓가를 간질였다. 예외적인 질문에 무어라 대답할지 흠칫 겁을 먹었지만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그렇게 날카롭지 않았다. 그저 저와 지내는 것이 정말 불편한지 순수하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우스울 만큼 뻔한 대답이 언어를 거치기도 전에 온 몸으로 표현되었다. 아니요. 열심히 도리질하는 머리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아 평소보다 더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풋 하고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에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 다시 내려가는 남자의 입 꼬리에 잘못 대답한 건 아닐까 또다시 안절부절 해하는 저가 있었다. 오 분에 한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이 가슴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까. 여린 날갯짓에 허덕이는 모습이 순수하다기 보단 저 혼자만의 변태적인 망상인 것 같아 두려움이 멎질 않았다.
“그럼 어떤데? 좋아?”
“...”
“내가 싫지 않아?”
폭주하는 머릿속은 구식 증기기관차마냥 느린 일처리와 다르게 엄청난 굉음을 난발하고 있었다. 물론 남자의 의도가 저의 심중을 들여다보는 질문은 아니란 걸 안다. 그저 저 혼자 설레발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린 동물의 것처럼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으니까. 저와 함께하는 것이 좋냐는 남자의 질문에 차마 다른 의미가 담긴 이 감정을 쉽게 토해낼 수 없었다. 입 안으로 수십 가지의 답을 웅얼거리며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남자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잉크처럼 번지는 당혹스러움과 가슴께를 두드리는 이 파리한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숨기고 싶었고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들키고 싶었다. 불편하지 않아. 함께 있고 싶어. 주인을 찾지 못한 대답은 숨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
“여기가 좋아.”
새어나오는 진심에 손을 저는 건 소리를 높인 남자가 아니라 귀 기울인 저였다. 입술 틈새로 들려오는 음절 하나하나에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수직으로 심장이 꽂혔다 일어난다. 불어오는 바람이 이제는 차가운지 따듯한지 분간조차 가질 않았다. 시계처럼 같은 곳을 맴도는 어지러운 기분. 모든 정신을 뺏어가는 남자의 진심에 어떤 감정을 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뒤죽박죽 섞여버린 노선을 풀어내고 싶어도 맺힌 땀방울에 미끄러지고 놓치기를 반복했다. 울컥 멈춰버린 발걸음은 주인의 의사를 반하며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의미에요. 어떤 말인지 알고 하는 거예요? 남자를 바라보는 제 표정이 얼마나 간절한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저와 함께하는 이 시간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좀 더 자세하게 말해줬으면 했다. 답답하게 옥죄어 오는 가슴팍. 단어 하나에 펄떡이는 심장박동이 한계치를 벗어난 것도 모른 채, 그저 들려오는 달콤함에 취해 모든 걸 잊고 꽃잎 위로 내려앉았다.
“네 곁이 좋아.”
“... 장난치지 말아요.”
“장난 아니야. 그냥, 나도, 잘, 잘 모르겠어.”
“...”
“네 옆은 아프지 않아. 항상 웃게 돼.”
그냥 네 옆에 있고 싶어. 삼켜지는 뒷말은 남자에게도 저에게도 그리 가벼운 의미는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만큼의 무거움을 지녔고 가슴 속 무언가를 얼마나 절절하게 만드는지. 귀에 닿는 것은 축복을 알리는 폭죽소리 보단 제 짝을 찾는 갈매기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길어지는 그림자와 늘어가는 감정선. 모든 만물이 제 자리를 찾아가 듯 남자의 진심은 어느새 제 마음 곁으로 다가왔다. 모른 척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릴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존재에 그저 저의 모든 걸 내맡기고 싶었다. 알고 있을까, 당신에게 들은 그 말이 못난 가슴을 얼마나 아프게 두드리는지. 한없이 기쁠 것 같았던 저의 마음은 슬픔과 그리움에 범벅되어 앞으로도 뒤로도 넘어지지 않았다. 아스러지는 별 조각들. 맞닿는 두 시선이 파도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린다.
“그럼 여기 있어요.”
“...”
“나랑 같이. 어디도 가지 말고.”
“...”
“여기 내 옆에 있어줘요.”
당신이 필요해. 그러니까 어디도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줘. 깊게 묻어둔 이기심이 잠시를 기다리지 않고 벌컥 문을 열어 나왔다. 눈물방울에 매달린 진심은 정말이지 구차하고 빌어먹을 정도로 간절했다. 터져 나온 바람, 그를 담아내지 못한 속 좁은 가슴. 남자의 흔들림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쓰레기같이 행동하고 싶지 않았고 당신의 감정을 한 철의 수단으로 폄하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제 욕심은 이성이 바란 데로 행동하지 못했다. 용기 내어 돋은 첫 발자국마저 스스로를 위한 하나의 동아줄로 밖에 여기지 못했다. 겁먹은 당신이 뒤로 세 발자국 물러난다 해도, 저는 꿀 먹은 사람처럼 그 입을 나불거릴 자격조차 지닐 수 없을 것이다. 비겁한 새끼. 등짝을 내려치는 어린 목소리는 다른 사람도 아닌 가슴 속 저의 목소리다.
“여기 있겠다고 말해줘요.”
“...”
“가지 않겠다고”
“...”
“너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해줘요.”
바짓단을 붙잡는 어리광을 피울 순 없다. 엄마를 찾던 5살 꼬마는 이제, 인연을 보내야하는 어른의 문턱에 다다랐으니까. 떼를 써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이 쥐어주는 장난감이 전부라는 걸 이젠 알게 되었다. 바람을 버릴 줄 아는 절제와 필요를 강구할 줄 아는 용기. 햇빛을 받고 양분을 받던 그 긴 시간 동안 양보를 배웠고 하나의 수단으로써 타협을 익혔다.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덕목들을 한 평생 배워왔으면서도 이 절박함 앞에선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감정을 앞세워 빌붙는 기회주의와 편협한 사고. 그래도 알아줬으면 했다. 스스로를 이렇게 사지로 내몰 만큼, 당신의 빈자리가 두렵고 그 맑은 웃음소리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며칠 새 침투된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조차 내리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눈앞에 놓인 해사한 빛을 이대로 놓쳐버리고 싶진 않았다. 이기적이라 욕해도 저는 할 말이 없다.
당신이 있어줬으면 한다. 내 곁에 남아줬으면 한다.
그러니까 제발.
-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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